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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Oct 03. 2024

희망고문

짙은 점의 번짐

소섬유신경병증

작은 신경섬유들이 선택적으로 손상되는 말초신경병증의 아형
신경병증성통증과 자율신경계 이상이 특징



그렇게 그 생소한 병명 아래로 처방이 난 약은 신경병증에 주로 사용하는 카르바마제핀 성분의 테그레톨정과 노트트립틸린 성분의 삼환계 항우울제 센시발정. 이 약 둘 다 전에도 복용한 적이 있던 약이었다. 카르바마제핀의 경우 그 약 자체가 섬유근육통에 *적응증이 있는 약이 아니기도 했고 두 약제 모두 다 효과는 없지 않았지만 그 작은 효과에 비해 견뎌야 했던 부작용이 더 컸기에 한 달 반 만에 복용을 중단했던 약들이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다시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던 추가약은 프레가발린 성분의 리리카캡슐. 아니 이 약을 다시? 앞서 말했듯 프레가발린의 경우 나는 부작용이 다른 약물에 비해 부작용이 제일 심하게 왔기에 ADR에 등록이 되어있던 약이었다. 하지만 다시 시도를 해본다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프레가발린을 복용했을 때 겪었던 부작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만큼은 섬유근육통이라는 병명을 배제하고 다시 한번 써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교수님의 말에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무섭다고 말을 건넸다. 이에 교수님께서는 제일 낮은 용량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하셨고 나는 병원 안에 있으니 죽진 않겠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오심이 가시지 않아 당겨 받기로 한 맥페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아침 추가약으로 경구 약이 올라왔다. 카르바마제핀, 노르트립틸린.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약들을 다시 마주하다니. 어찌 되었든 이 약을 복용하면서 치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치료에 임해야 하는데 자꾸만 부정적인 마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났다. 이 약들이 애초에 날 낫게 할 약이라면 처음 복용했을 때 이미 나를 어떻게든 바꿔놓지 않았을까. 어차피 먹어도 낫지는 않을 거야. 근데 내가 나을 수는 있는 건가?






한바탕 검은 마음들과 사투를 한 후 검사실에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병동보조원분이 동행을 해주셔야 하는데, 스케줄이 꼬이게 되어서 혼자 내려가게 되었다. 검사실은 외래층에 위치해 있어서 폴대를 끌고 내려가야 하는데 환자복을 입고 외래층에 내려가는 게 너무도 부담스럽고 긴장이 되었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검사실을 찾아갔다. 신경전도검사실이라고 적힌 것을 보자마자 나는 폴대를 꽉 쥐고 온 힘을 다해 재빠르게 걸었다.


“어! 그래도 혼자 잘 찾아왔네요~!”

검사실 선생님께서는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그에 모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QSTQSART라는 검사를 하러 갔는데 QST는 정량적 감각 기능 검사라는 것으로 손의 온도 감각, 진동감각, 통각을 측정해 정량화한 후 이상을 확인하는 검사이고 QSART는 정량적 발한 축삭반사 검사로 통증 부위의 땀분비 정도를 측정해 정량화한 후 이상을 확인하는 검사다. 어떠한 검사든 통증 환자의 입장에서는 감각의 극한으로 밀어붙여 측정하는 검사여서 다 힘들었지만 이 중 제일 힘들었던 검사는 온도 감각 기능 검사였다. 조금이라도 차고 뜨거운 걸 쥐고 있지 못하는 내게는 뜨거워지는 기계를 손에 쥐고 검사를 하는 게 너무 버거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뜨거울 때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나는 너무 뜨거워 버튼을 누르면 "아직 아닌데.", "벌써 뜨거워요?"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내 손이 타버릴 때까지 참아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며 울컥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검사 앞에서 선생님께서는 검사를 하는 내내 칭찬을 해주시고 장난도 치시며 내 집중을 끌어올려주시고 긴장도 계속해서 풀어주셨다. 검사 내내 온 신경을 자극한 덕에 잠자고 있던 내 신경계를 모두 깨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신경까지 피로하다는 말을 새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검사 결과 상 모든 게 정상이었고 수십 줄이 넘는 검사 결과지는 온통 normal(정상)로 도배되어 있었다. 물론 정상이면 좋은 결과인 것이지만 상세불명으로 길게 투병을 해온 내게는 그다지 달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명확한 원인과 병명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무언의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더더욱 싫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기대를 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으니 이제는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고 해서 소섬유신경병증이 아닌 게 확실함~ 이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소섬유신경병증은 자체가 수치 상으로는 정상인 경우가 많아 진단받기가 어려운 질환이라고 덧붙이셨다.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그 병명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고 계속해서 약물치료는 이어가기로 결정이 났다. 그 이야기로 또다시 시작된 희망고문이었다.

 

더욱 복잡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병원 로비를 산책하는데 귀가 먹먹해졌고 이어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지는 일이라면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그 증상 자체가 너무 거슬리고 짜증이 났다. 이 세상 모든 악한 것들이 "얘 괴롭힐 사람?" 해서 모여 나를 괴롭히려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에 나는 힘없이 맞기를 반복하는 결말 뭐 그런거. 짜증을 겨우 눌러 담으며 병실로 올라왔는데 루틴 약이 한가득 내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겨우 눌러놓은 짜증이 폭발해 버렸다. 입원 이래 계속 흐리고 비가 왔었는데 그날따라 이런 날 비웃듯이 날씨는 너무나도 화창했다. 그날은 하늘 대신 내 눈에서 비가 쏟아졌다.







패취에 묻어 잊고 싶던 통증이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온 살갗을 뚫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등은 채 칼에 갈리는 것만 같았고 손목과 손은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듯 뜨거웠다. 하지만 아프다고 요청해서 더 받을 수 있는 진통제는 소염진통제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입에 밀어 넣곤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통증은 내 잠까지 방해했다. 그 길로 나는 벌떡 일어나 무어라도 마시며 안정을 찾겠다며 휴게실로 갔고 그렇게 마신 음료수는 위에는 도달했는지도 모르게 마시자마자 다시 게워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나는 또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진짜 너무 힘들다.”

그냥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늘 드는 생각이었지만, 이 생각이 들 때 마다 갱신이 되는 것 마냥 새롭게 아프고 힘들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런 근육통인 줄 알았는데, 통증이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 날 괴롭히다니. 아니 통증 하나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나 많은 증상들로 번져서 나를 괴롭히다니. 통증이라는 점 하나 자체가 원래 크고 짙게 찍혀서 이렇게 번짐이 큰 걸까. 이 모든 과정에 오롯이 혼자 있던 게 아니었음에도 하루하루 나는 너무 외로웠다. 그 외로움들이 쌓이고 쌓이다 울분이 터졌다. 어디서부터 시작인거지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통증의 시작이 없었을까.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더라면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 있을까. 그 와중에 나는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을까. 왜 이렇게 감사함을 모를까. 내가 이렇게 스스로 걸어 다니고 밥을 먹을 수 있으며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하는데, 왜 나는 그게 안될까. 그냥 이렇게 타들어가는 느낌 그대로 타들어가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적응증 : 어떤 약이나 수술로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질환이나 증세로, 특정 검사나 치료를 시행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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