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되기 전 이야기 1
고등학교 때 국어가 싫어서 이과를 선택했었지만, 독일어나 영어 같은 어학을 좋아해서 러시아어과에는 교차 지원을 해서 입학을 했다. 독일어는 상당히 좋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과외를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친구가 독일어를 워낙 못 해서 독일어 때문에 전체 평균 점수가 떨어졌고, 독일어만 잘하는 내가 시험 보기 전에 족집게 과외를 해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덕분에 독일어 점수가 올라갔고, 결국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튼 국어가 싫었던 내가 이과를 선택했다가 다시 문과인 러시아어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모순과 각종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로 가득 찬 선물 상자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 택시 운전기사, 시외버스 운전기사였다. 운전 하나는 정말 잘하시지만,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의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술친구가 만나면 아버지의 직장이 바뀌곤 했다. 물론 이 직장이라는 것이 비단 한 도시 안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회사는 고향인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바뀌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짐을 쌌다 풀기를 반복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없이 많은 이삿짐을 쌌지만 나는 여전히 정리 정돈을 못 한다. 어쩌면 정리 정돈 유전자라는 것은 노력이나 학습 같은 것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면서 문득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수차례에 걸쳐 이사를 하는 동안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성적도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던 끝에 고 3 시절 성적은 바닥을 향해 달렸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말이다. 나는 물론 '이사'란 녀석을 의심했고, 이사를 미워했다. 그놈의 이사만 아니었어도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나는 명문대학교까지는 아니어도 꽤 괜찮은 대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며, 어쩌면 삶이 한 뼘쯤 더 윤택해졌으리라는 다소 황당한 논리를 펴면서 부모님도 원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안양대학교 러시아어과에 입학했고, 다행히 러시아어가 적성에 맞아서 지금까지 러시아어와 씨름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역마살까지 끼었는지, 직장을 자주 옮기셨다. 술을 드실 때면 자주 감상에 젖으면서 ‘내 그땐 이랬다 아이가!’라며 밤새도록 했던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셨고, 아버지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만으로 밥상과 그릇들은 자주 공중에서 이마를 부딪히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수도 없이 아버지를 미워했고, 수년이 흐른 뒤에 아버지도 폭력과 학대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나 역시 마음속 상처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몸이 힘들어서’, ‘외로워서’, ‘엄마가 교회에 가셔서’, ‘기분이 안 좋아서’ 등과 같은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 집의 가세(가세라고 해 봐야 더 이상 기울 데도 없었지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었고, 집을 소유한 적도 없는 우리는 결국 월세를 전전하게 된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으니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사치였던 셈이다.
러시아어과 동기들은 대부분 최소한 1달이라도 러시아에 다녀왔지만,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최대 과제인 나에게 러시아 여행이나 연수는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보습학원 강사, 국민연금 관리공단 직원 등을 전전하면서 러시아어를 좀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욕망 혹은 원서를 원 없이 사고 싶다는 바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6개월 치 내 월급, 엄마가 식당에서 일해서 받은 몇 달 치 급여, 그리고 교회 성도들이 모금해주신 돈을 들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상당히 위험하고 무책임한 생각을 가슴속에 넣고 머나먼 러시아로 떠난다. 결국 유학 생활 동안 쓴 대부분의 돈은 어머니가 빚을 내서 보내주셨고, 그 돈은 귀국 후에 모두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절약하면서 살았다. 밥은 무조건 집에서 먹었고, 식료품은 싼 곳이 있으면 버스 타고, 전차 타고, 또 버스를 타고 가서 사 왔으며, 필요한 책도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가면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에서 샀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며,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사고 싶은 원서를 원 없이 까지는 아니어도 필요한 만큼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행복했다. 다행히도 러시아에서 만난 친구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고, (러시아 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도 무척 좋은 분이셨다) 석사 동기들도 모두 다 좋아서 무척 즐겁게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어문학부 축제 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