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올레길 2
말 따라가는 몰질 입구를 돌아
샘이 나는 절벽 박수기정 길을 오르네.
야자수와 귤을 재배하는 곳
한밭 소나무 오솔길에는
감장 노랑 호랑나비가
펄럭펄럭 춤추듯 흔들리고
작은 새 하나 가지 떠나 전선 위 앉네.
가을이 올려나
고추잠자리 여러 편대가
무한 비행 하는 곳
여기는 태흥사 삼거리
꼬닥꼬닥 천천히
도라도라 돌아서
오라오라 올라서
*피 흘린 농궤바위가 사는
군산 오름의 꼭대기에 서서
나는 남해의 바다를 바라보고
구름에 싸인 백록담을 바라보며
아기 업은 채 돌이 된 머슴을 생각해 본다.
그는 돈과 명예 자유 무엇을 원했을까?
순간, 베르디의 나부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떠오른다.
화려했던 계곡은 어느덧 늙어 버렸네.
흐르던 물은 가물어 멈춰 섰고
발가벗고 뛰어놀던 못엔 흙탕물이 지나네.
올레꾼들이 발 담고 가던 옛 계곡
목을 축이려 먹던 무인 귤 가판대
이젠 껍질만 썩고, 천 원짜리 지폐만 남아
화려했던 옛날의 젊음을 그리워하네.
아! 빨리 가버린 세월이여!
늙어버린 여배우 같은 계곡이여!
금빛 모래해변을 향해 가네.
창고천다리 건너, 진모르동산을 내려와
처음으로 바다를 보네.
개끄린 다리를 건너 나는 바다로 간다네.
뒤돌아선 산길이 내게 말하네.
“폭싹 속았수다. 또 봐 수다.”
금빛 모래는 이제 보이지 않네.
은빛 파도는 너무 멀어졌다네.
산방산이 큰 소리로 나무라고 있는
모래사장 앞 회색빛 너를
나는 왜 계속 야속하기만 한가
(2025. 8. 20. 올레 9코스 몰질입구 > 군산오름 > 안덕계곡 > 화순금모래해변)
*옛날 제주에 '농궤(농부 또는 머슴)'로 불리던 힘이 아주 센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거칠고 억울함이 많아 세상과 사람들에게 분노를 품고 지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큰 억울한 일을 당한 농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바위를 향해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몸을 부딪쳤는데, 그때 바위가 피처럼 붉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사람의 한과 원혼이 바위에 스며들어 피를 흘린다'라고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뒤로 그 바위를 '피 흘린 농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2025년 8월 20일 수요일
무덥던 더위도 한풀 꺾이는 듯합니다. 협재의 아침은 제법 시원합니다. 어제 지인들로부터 왜 땡볕에 고생하느냐고, 1년 동안 있을 건데 좀 천천히 하는 게 어떻겠냐는 걱정의 메시지가 여러 군데서 왔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힘들게 15~20km를 한 여름에 누가 알아준다고 **놈처럼 돌아다니며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워서, 힘들어서. 집에 어른들도 계시고, 시간도 많은데 왜 이 짓을 하는지 길을 걷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걸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지금 안 하면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퇴직을 하고, 마음에 공허를 느낄 사이도 없이 섬(島)에 들어왔고, 낯선 생활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프리카 우간다선교를 다녀왔고, 섬(島)에 들어올 때 처갓집 어른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잘 걷지 못하시는 아버님, 잘 보지 못하시는 어머님과 함께하는 섬 생활이 녹록지 않습니다. 외롭고, 허전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러니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눈을 감으면 잠이 바로 오고, 폰만 들면 글이 써집니다. 사람들로부터, 도시로부터의 해방이 이런 자유를 가져다주네요. 오래간만에 맛보는 이 자유를 짧게나마 만끽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또 걷습니다. 협재의 아침은 오늘도 앳된 모습으로 도보자를 반겨주네요. “꼬닥꼬닥,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08시 30분, 8코스 종점이자 9코스 시작점인 대평포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태양이 이글이글 거리네요. 9코스는 짧지만 절벽과 오르막이 있어서 난이도 '上'의 쉽지 않은 코스입니다. 뜨거운 태양과 고난도 경사가 도보자의 마음을 흔드네요. 이 흔들림이 기쁨으로 되돌아오길 기대하며 힘차게 첫 발을 내딛습니다. 현재시간 08시 40분입니다.
몰질 입구로 발길을 옮깁니다. '몰질'은 말이 다니던 길입니다. 고려시대 제주 서부 중간 산 지역에서 원나라로 말을 싣고 가기 위해 말을 몰아가던 길'입니다. 이 길의 입구가 실제적인 9코스의 시작입니다. 9코스는 여기서 출발하여 군산오름을 지나 화순금 모래해변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말 대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몰질 입구에 들어섭니다.
검은 나비가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새소리가 나더니 산새 한 마리가 가지에서 가지로 몸을 옮겨갑니다. 노랑나비는 꽃잎에 앉았습니다.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 길을 나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걷습니다. 나무에는 튼실한 여름귤이 달려있고, 지중해 야자수는 키가 커지기만을 기다립니다. 누구나 詩人이 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오솔길을 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걷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한밭소낭길'입니다. 농지를 뜻하는 '한밭'과 소나무를 뜻하는 '소낭'이 어우러진 고요한 오솔길입니다. 잠시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 길을 걸으며 곧 올 가을이 느껴집니다. 고추잠자리가 꽤 많이 날아다니는, 아름답고 조용한 길을 시간은 여름을 지나 가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09시 50분, 오르기 시작한 군산오름은 10시 24분, 오름의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34분간의 오르막입니다. 정상에는 멋진 올레 말조형물인 의자가 있고, 서쪽으로는 남해바다가 보이며, 동쪽으로는 한라산이 구름에 덮여 있고, 서북쪽으로는 산방산이 머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숨이 막히고, 땀을 흘려야 볼 수 있는 중간 기착지 군산오름에서 가져온 연양갱과 물을 마십니다. 걷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축복입니다. 몸은 기력이 다 떨어졌으나 정신만은 또렷합니다.
10시 40분, 하산합니다. 약간의 간식이 잃었던 체력에 비타민이 되어 주네요. 힘을 내어봅니다. 10시 57분, 산을 내려오는데 17분이 걸렸습니다. 군산오름은 7-1코스에 있는 고근산과 비교해 만만치 않게 힘든 산입니다. 다만 고근산이 급경사로 오르막이 높게 있다면, 군산오름은 완만한 경사로 산의 경사면을 둘러 걷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산이 전체적으로 습(濕)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이 산은 묘를 쓰지 않는 금장지(禁葬地)라고 하네요. 정상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전망을 위해 1시간 정도는 넉넉히 양보할 수 있는 멋진 오름입니다. 산을 뒤로하고, 도보자는 또다시 평지 길을 걷습니다.
안덕계곡의 데크 길을 1km 정도 걸었습니다. 화려했던 계곡의 인기가 잠시 사라진 느낌이랄까요. 계곡물은 퇴색되어 있고, 숲은 어둡네요. 화려했던 젊음도 실은 이렇게 떠나가는 것인가요? 늙어버린 유원지가 되어버린 안덕계곡입니다.
13시 20분, 9코스 시작점 대평포구에서 08시 40분 출발해서 4시간 20분 만에 종점 화순금모래해수욕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여러 군데 공사 중이라 원하던 뷰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이 아쉬운 올레 9코스 ‘대평-화순’ 구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