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7-1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제주 사내


버스기사가 큰소리로

"아즈매, 거 좀 조용히 하쇼" 말한다.


식당 앞에 만난 사내는

바다가 그리워 제주에 다시 들어왔다.

앞 이가 두어 개 빠지고,

피운 담배로 말할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나는 그는

내가 서울 말씨를 쓰자

제주말을 금방 바꿔 나와 대화한다.


둑 위에 서서 문어낚시 할 때마다 그는

고향 사람들과 곧잘 싸웠다.

그래도 떠난 아이들에게 그는

제주말을 잊지 말라고 한다.


무엇이 그를 바다로 불렀을까

무엇이 그를 섬(島)으로 오게 했나


버스기사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말한다.

해녀들은 물질을 해서 귀가 안 들려여

지가 안 들려서 그래 목소리도 커지구여


나는 그때 알았다.

남들 말 듣고 속 태우느니

솔직한 자기 목소리로 살고파

그는 바다에 왔겠구나.

그래서 섬(島)에 다시 왔겠구나.

(2025. 8. 13.)



2025년 8월 18일 월요일

5년 전 겨울, 제주 남쪽지역을 걸었을 때 가장 힘들었던 7-1코스를 오늘 걷게 됩니다. 광복절 연휴 3일간 쉬었는데 몸은 서로 다른 소리를 냅니다. 긴장이 풀려서 힘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푹 쉬어서 다리가 기대에 찬 듯 부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도 걱정 반, 기대 반입니다. 그때 힘들게 올랐던 고근산이 부담스럽게 마음속에 응어리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비양도의 늠름한 모습과 벌써부터 길을 걷고 있는 올레꾼들을 보며 힘을 내봅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스페인에서 순례자들끼리 만나게 되면 서로 인사하던 ‘부엔까미노’라는 말처럼 제주 올레에서도 올레꾼 간에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꼬닥꼬닥 올레’입니다. '꼬닥꼬닥'은 '느리게, 천천히'라는 제주어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자기 몸의 페이스에 따라 조금씩, 천천히 올레 길을 느끼라는 뜻 인가 봅니다. 인생의 깊이를 온전히 깨닫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원한 아침, 벌써부터 올레 길을 꼬닥꼬닥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네요. “꼬닥꼬닥,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08시 25분, 더위와 힘든 오르막으로 고된 일정이 예상되는 7-1코스를 서귀포버스터미널 앞에서 시작합니다. 길은 신시가지에서 시작해서 오르막 중간쯤, 건물 왼편을 끼고 돌아서 숲길로 들어섭니다. 고근산으로 오르기 위한 코스프레 인가요? 긴장감이 맴돌지만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두려움은 모두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숲길입니다. 길에서 60대 부부 올레 꾼을 만났습니다. 반갑네요. "꼬닥꼬닥" 하고 인사합니다. 부부가 함께 걷는 것이 무척 좋아 보입니다.


5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엉또폭포를 향해 걸어갑니다. 비가 와야 볼 수 있다는 이 엉뚱한 폭포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런지요? '엉또'에 '엉'은 ‘작은 굴’이라는 뜻이고, '또'는 ‘입구’라는 뜻입니다. 합쳐보면 작은 굴의 입구가 되네요. '엉뚱하다'는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네요. 예상대로 이 폭포의 물줄기는 보지 못했습니다. 30m 앞에서 펼쳐졌을 시원한 폭포의 소리와 풍경을 상상하며 내려옵니다.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시작점부터 4.9km 지점, 길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고근산이 다가옵니다. 5.9km 부근에서 도로와 만납니다. 고근산이 애간장을 녹이네요. 다시 오르막입니다. '두려운 고근산 이여! 기다려라. 내가 곧 간다.'

고근산입니다. 나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실 이를 의지하며, 한발 한발 내딛습니다. 산을 올라갑니다.

20분을 올라왔습니다. 시작점으로부터 6.7km 부근 드디어 고근산 정상에 왔습니다. 5년 전 겨울, 나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 채 뒤 흔들어놨던 산의 전망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때 그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한 번도 여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주 꿈속에서 봤던 고근산 위에 나는 홀로 서 있습니다.


고근산을 하산해서 호근마을로 들어섭니다. 이 마을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마을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었습니다. '만약 제주도 온다면 여기서 살고 싶다.' 하고 생각했던 마을이 바로 여기입니다. 마을입구 편의점을 지나자마자 좁은 숲길로 들어갑니다. 5년 전에는 화살표를 못 보고 바로 마을로 향했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입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좁은 길로 들어섭니다.


호근로를 지나다가 벽화를 그리고 계신 도색공을 만납니다. 평생 페인트를 칠하셨던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길(호근 서호로)은 도로를 따라 이어집니다. 사거리를 지나 길은 새로운 길 하논 분화구를 향해 연결됩니다. 다시 좁은 길로 들어갑니다.


호근리 하논마을은 1948년 11월 19일 무장대습격으로 주민 1명이 사망하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고, 경찰토벌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소각되어 사라 졌습니다. 이 비극 와중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인근의 남성리, 호근리, 서귀리 등지에 눌러앉게 되면서 하논마을은 재건될 수 없었으며, 1960년대 이후 감귤과 수원으로 변해버림으로 하논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주민들은 소개지(疏開地)에서 생활하면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 도 했습니다.


더 이상 4.3과 같은 비극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길은 사라진 하논마을을 지나 하논분화구로 향해 갑니다. 하논은 '큰 논'이라는 뜻으로, 수 만년 동안의 생물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논분화구의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도로로 올라서면 서귀포게이트볼경기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걸매생태공원과 게이트볼경기장 사이 길로 걸어갑니다. 그늘진 곳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목적지까지 0.8km 남았습니다.


13시 27분, 종착지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시작점 서귀포 버스터미널에서 총 5시간 2분 걸렸습니다. 7-1코스는 두려웠던 고근산을 등반하는 코스 때문에 시작부터 긴장했었습니다. 실은 두려웠던 것보다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서귀포 신시가지에서 한라산으로 올라가다 고근산 초입부터 정상까지 오른 후 호근마을과 하논분화구 지역을 도는 7-1코스는 처음으로 바다가 없는 코스입니다. 산과 산 아래 마을을 도는 이 코스는 고근산과 호근마을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마음에 품은 사람이나 마을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7-1코스, 꿈이 현실이 되는 또 하나의 추억의 올레길이었습니다.

올레7-1코스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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