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2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나는 걷는다

걸어야 보이는 것들

온몸이 부서져야 알아지는 것들

숨이 턱까지 막혀봐야 생각나는 것들

헤어지고 외롭고 고독해져야

내 속에 있는 내가 보인다.

내 맘에 있는 네가 보인다.


나는 걷는다.

심장이 요동 칠 때마다

나는 떠난다.

잠 못 이루는 길 위에서

나는 쓴다. 네게 긴 글을 쓴다.


나는 걷는다.

길이 나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네가 나를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나의 육신은 땅 끝까지 걸어가고

내 영혼은 천국까지 네게 이르리.

나의 길이여! 나의 베아트리체여!

(2025. 8. 5)



2025년 8월 5일 화요일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났고, 왼쪽 눈에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몸이 길을 떠받는 고통을 표현하기 시작하네요.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은 맑아져 어김없이 새벽 5시 30분에 깨어납니다. 간밤 폭우소리에 잠깐 잠에서 깨어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 비 예보는 없습니다. 새벽 비는 예정에 없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제주 날씨네요. 제주는 오늘 전체적으로 ‘맑음’입니다. 몸을 깨워 올레 2코스를 시작합니다. 기다리고 있을 길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06시 27분, 협재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협재 바다는 잠시 내렸던 폭우로 화난 것처럼 거치네요. 세 번째 올레길 위로 나아갑니다.


'왜 나는 고통스럽게 걸으려 할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짓을 더더구나 남들이 웃고 즐기는 관광지에서 실핏줄 터져가며 왜 하는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티아고순례길을 걸을 때처럼 나는 묻습니다. '주님! 왜 제게 이런 힘든 일을 하게 하시나요' 내면의 나는 육신의 내게 무슨 설득의 말을 건네줄까요. 눈은 감기고, 몸은 버스 맨 뒷좌석에서 쓰러지듯 내동댕이 쳐있습니다. 길이 내게 줄 답변을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09시 43분, 올레 1코스의 종점, 2코스 시작점에 도착했습니다. “부엔까미노,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길은 성산일출봉을 우측으로 끼고, 내수면둑방길, 오조리 마을을 거쳐 식산봉 오름길로 향해갑니다.(1.9km) 이 길은 숲이 우거져 나무 그늘이 생겨나고, 은밀한 정원을 만들어 냅니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작은 행복감을 주네요. 2.7km 지점, 드디어 식산봉으로 올라갑니다. 정상까지 오르막 계단을 300m 정도 오릅니다. 멋진 성산일출봉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산을 내려옵니다. 죽을 것같이 힘들게 올라왔던 산길의 내리막은 균형을 앞으로 쏠려 놓기만 하면 저절로 내려갑니다. 죽을 것 같았던 조금 전의 일이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쉬워집니다. 시원한 그늘이 있고, 해가 온몸을 쪄서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삶은 이렇게 이분법이던가요? 공포에 떨던 간밤의 고뇌도 조금만 비껴가면 낙원이던가요? 나는 72m의 식산봉에 오르면서 생의 빛과 어둠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조금만 더 참을 걸, 조금만 더 견뎌볼 걸, 그때 왜 그 사람을 그리 미워했을까?


1시간 40분 걸어왔습니다. 현재까지의 길은 성산일출봉이 내려다보이는 ‘오조리 철새서식지’를 한 바퀴 도는 코스입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겨울에 오면 참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은 저수지 끝자락에서 도로를 만났습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성산읍 고성리 도로를 통과합니다. 마을입구로 엄청난 바람이 부네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면서 맛있어 보이는 빵집을 그냥 지나갑니다. 배가 고파오네요.


드디어 오늘 올레 길의 가장 난코스 대수산봉에 와 있습니다. 이 봉우리는 해발 134m의 낮은 봉우리지만 이 위에 올라가면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 과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등 동부 제주의 명소를 다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고르고, 뜨끈해진 생수로 목을 추리며 힘을 내봅니다. 이 오름을 내려오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겠지요. 출발지로부터 8.1km 지점입니다.


오십 중반이라는 사실을 여실이 깨닫게 됩니다. 5년만 젊었어도 날아왔을 텐데. 다리 떨리기 전에 가슴이 떨리면 떠나야 된다는 우간다 김선교사님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제 심장은 이 설렘을 언제 멈추게 될까요? 온몸은 쑤시고 아프지만 가슴은 심하게 요동칩니다. 터질 듯 한 심장에 시원한 바람을 넣습니다.

대수산봉 정상에 도착한 것이 12시 40분, 산을 내려온 후 산길을 걸은 지 40분이 지난 13시 20분이 되었는데도 마을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어깨는 아파옵니다. 이제 뜨끈해진 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출발지로부터 11.7km 지점입니다. 마을이 보이기를, 식당이 나오기를,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기를, 마지막 힘을 모아봅니다.


‘혼인지’, 친인척이 드문 제주사람들에게 결혼은 마을에 큰 잔치였습니다. 제주에서 결혼식은 결혼식 전날 양가 친척들이 모이는 '가문잔치', 결혼식 당일 양가 가정에서 각각 치르는 '잔치', 결혼식 다음날 신부 집에서 치르는 '사돈잔치', 그다음 날 신랑 집에서 치러지는 '사돈잔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결혼식은 일반적으로 3일이 걸리고, 준비와 결혼 후 집안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까지 길게는 7일 걸립니다. 그러니 혼례는 제주에서는 모처럼 마을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동네 빅 이벤트였던 것입니다. 특히 혼례와 관련된 이 '혼인지'는 설화와 더불어 아름다운 풍경으로 도보자의 흥미를 끌게 합니다.


14시 30분, 2코스 종점 온평포구에 도착했습니다.(총시간: 4시간 47분) 중간에 결국 식당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도착지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쉬지 않고 15Km를 걸어왔네요. 천국과 같은 온평포구입니다. 최고 비싼 옥돔구이로 고생한 내게 선물합니다. ‘수고했어. 고생했어. 너는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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