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코스
섬(島) 안에 길이 있었네.
바다를 품은 산과 숲이 길을 내고
파랑리본을 따라간다네.
빨강리본을 따라간다네.
세상을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단순한 일이었는데
나는 무엇을 따라갔단 말인가?
나는 누구를 쫓아갔단 말인가?
산이 나를 보고 꾸짖네.
오름이 나를 보고 타이르네.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나.
네 옆에 좁은 길이
바다에 이르는 이 길이
언제나 자네 곁에 있었다네.
내내 자네를 바라보고 있었다네.
(2025. 8. 1)
2020년 겨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마치 밀려왔다가는 다 휩쓸어버린 쓰나미처럼 제주의 길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영욕의 봄, 여름을 다 떠나보내고, 나는 쓸쓸한 가을을 돌아서 빈 겨울의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그를 만났고, 그가 걷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 후 나는 언젠가 다시 여기 오리라 다짐했습니다.
2025년 여름, 나는 홀로 섬(島)을 다시 걷습니다. 29년간 다니던 직장을 오십 중반에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섬(島)에 들어왔습니다. 섬(島) 생활이 한 달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도 누군가로부터 업무지시받는 꿈을 꾸다가 깨어납니다. ‘나는 없고, 나 닮은 로봇으로만 살았나?’ 하며 문득 섬뜩해집니다.
내가 사는 협재 2006 번지에서 1코스 시흥리 정류장까지는 버스(202번)로 3시간 17분을 가야 합니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성산 방면 201번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첫날부터 긴 버스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8월 1일 금요일 새벽 4시 40분,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집니다. 사위(四圍)는 어둡고, 고요합니다. 낯선 길을 떠나야 하는 긴장감이 발밑에서부터 글 쓰고 있는 눈동자 위까지 올라옵니다. 떨리는 눈에 힘을 주고 하나씩 타이핑합니다. 길 위 다리로 쓰는 작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을 켜고 어둠으로부터 길을 냅니다.
06시, 202번 제주버스터미널 방면 차가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막 지나가는 버스를 급히 세우고 승차합니다. 27개 코스, 437km의 제주 올레길이 열립니다. 차도 사람도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올레 길의 순방향, 리본표식의 파란색 길입니다. 09시 15분, 201번 버스는 시흥리에 도착합니다. 집에서 출발한 지 3시간 15분 만입니다. 드디어 올레길이 시작됩니다.
길은 올레안내소까지 직선으로 뻗어 있습니다. 처음 만난 올레길 표식을 사진에 담습니다. 이제 나는 오롯이 이 표식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이 표식만이 갈 방향을 정해줍니다. 안내소 우측부터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말미오름입니다. 30분 동안 길은 오르막을 따라가다가 10분간 내리막을 거쳐, 20분 평지로 이어집니다. 거의 오름이 끝나는 지점에서 U턴을 해서 다시 오던 방향을 되돌아가네요.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알오름입니다. 올레 길의 묘미가 이런 것인가요? 나는 왔던 방향의 다른 샛길을 따라 다시 걷습니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 만에 ‘종달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앞에 아름다운 ‘종달초등학교’ 전경을 사진에 담습니다. 조카들도 이런 아름다운 학교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어린 시절부터 여기 아이들은 詩人이 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종달 마을에서 고기국수를 먹습니다. 오늘 먹는 첫 끼니입니다. 고기국수는 처음 먹어보는데 고기가 국에 부담되게 들어가 있어서 손도 안 댔는데 의외로 담백하네요. 살코기 몇 점으로 체력을 보충합니다.
출발한 지 2시간 20분 만에 종달 염전을 지나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지점을 통과합니다. 도로와 사람이 걷는 길과 바다가 평행선을 그으며 이어집니다.
유명한 목화 휴게소에 들러 맥반석구이로 단내를 지웁니다. 제 자리 앞으로 주민 한분이 오징어를 손보시네요.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한 폭 수채화가 됩니다. 성산일출봉이 시야에 들어오자 왠지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화 휴게소에서 7.7km이니까 아직 반 밖에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판입니다. 긴장을 풀고 있다가 오히려 통증이 생겨났습니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등이 아파오네요.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 가 봅니다. 2-3km 남기고는 왼쪽 신발 끈을 느슨하게 하고, 오른쪽 어깨끈에 손을 집어넣고 걷습니다. 다음에는 짐을 줄이거나 신발을 바꿔야겠습니다.
14시 10분, 4시간 55분 만에 1코스 종점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언젠가 렌터카로 사진 찍으러 온 이곳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습니다. 첫 트래킹은 너무 쉽게 생각했다가 후반에 생각지 않은 통증으로 고생한 도전이었습니다. 보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산일출봉 인근, 코스의 종점인 광치기 해변에 있는 반지모양의 아치 내부를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4.3 당시 성산일대는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한 후로는 이곳 성산은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때 사망한 사람 수가 무려 4백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반지모양의 내부에는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산에 이런 비극이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오늘 길을 걸으며 잠시 잊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빠져서 사람들에 대해 잊었습니다. 올레 안내소에서 만난 부스스한 중년의 사내가 이것저것 묻는 것이 좀 귀찮았고, 마지막 종점에서 만난 올레 꾼에게도 좀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글쓰기에만 집중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걸을 때 낯선 이들에게 "부엔까미노(당신 여행길에 행운이 함께하길)"하고 인사하던 것을 잊었습니다. 순례길이든 올레길이든 인생길이든 길 위에 선 이들에게 축복의 말, 행운의 말, 안전의 말을 서로 건넸어야 했는데,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빠져서 그만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나만 생각했습니다. 걷는 것이 혼자만의 일이라고 잠시 착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