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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t Pin Oct 15. 2020

아이 핑계는 대기 싫어요.

한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 말고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

서른이 갓 넘었을 때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긴 좀 늦었고 그렇다고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꿈을 포기하고 직장만 다니자니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았다.

어릴 적 막연하게 꿈꾸던 박 박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박석사 정도는 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육아와 일과 가정의 양립은커녕 공부할 시간도 나지 않아 매일을 허덕이게 되었다.

그나마 회사의 배려로 7시부터 5시까지 근무를 하고 일주일에 3번은 이문동에 있는 대학원에서 밤 9시 40분까지 수업을 들었다.

회사에서 이문동까지는 내 차로 30분 남짓.

5시 30분에서 6시 30분까지 남은 한 시간에 과제도 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니 대게는 학교 안에 있는 아티제에 앉아 책을 펴고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으며 본디 카페인에 민감한 내 몸에 투샷 혹은 상황이 위급할 시엔 때때로 목숨 걸고 쓰리샷 아메리카노를 들이붓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수업이 끝나고 성남 집으로 오는 차 안이었다.

이미 9시부터 몽롱한 내 정신을 부여잡고 40여분 남짓 운전을 해서 성남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끔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레드불스 같은 카페인 드링크을 먹었는데 그럴 때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아 이렇게 멀미하다 죽느니 차라리 편하게 졸다가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힘겨움은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역경과 고난은 모두 내가 자초한 것이니 나 자신을 다그치면서 때로는 어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진짜 역경은 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다.


그 날은 내가 당직이었고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아침은 공기부터가 나른하다. 들쉬고 내쉬는 숨 속의 공기의 밀도마저 느슨하게 느껴진다.

오래간만에 북적거리지 않는 사무실이었고 학교 수업도 없어 마음이 가벼웠다. 평소 혼자 있을 시간이 없는 나에게 당직 근무는 오히려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9시 팀장님이 출근하기 전까지 최소 2시간 정도는 나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9시가 조금 지나 팀장님이 출근했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내 업무에 집중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갑자기 조용했던 내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 내가 회사에 있을 때는 전화를 한 번도 하지 않던 남편의 전화였다.

" 여보세요? 여보... 재인이가.."

평소 모든 일에 지나치리만큼 침착한 그였기에 혼비백산한 그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 무슨 일이야? 재인이가 ?"

" 아까부터 자꾸 분수토를 하는데.. 내가 병원에 데려가려고 차에 태우고 가는 중인데도 토가 멈추질 않아.. 지금 응급실에 가고 있는데 애가 자꾸 쳐지고.. 내가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어떡해야 할지 나도 너무 무서워서..."

순간 내 얼굴이 굳고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난 내 남편에게 맘에도 없는 말을 아주 냉정하게 내뱉고 있었다.

" 나 지금 근무 중이잖아. 일단 병원에 가. 그리고 다시 전화해."



그때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팀장님이 나에게 이야기했다.

" 무슨 일이야? 아이가 아파?"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금 남편이 있으니까 퇴근하고 병원으로 가면 돼요. 어차피 제가 간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요. 뭘"

심장에서 피가 울컥울컥 솓구치는 듯 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려 떨려오는 목소리를 목구멍 깊숙이 자꾸 밀어넣었다. 이런 일 즘으로 회사일도 못하는 애엄마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아이가 아픈데 일이 되겠어? 빨리 가봐."

나는 5초간 침묵한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아이 핑계는 대기 싫어요..."

그렇게 나의 못난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그러자 팀장님은 내가 안쓰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 박 대리..... 내가 설마 아이가 있는 여직원은 퍽하면 아이 핑계나 대고 회사일에 집중 못한다고 생각할까 봐 그래? 자네 아이는 가족 아닌가? 아이도 가족이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해?

여기 있는 팀원 누군가의 가족이 갑자기 아파서 가봐야 하는 상황이면 나는 그 누구든 보내주었을 거야.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고 어서 가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또한 행여 무너질세라 겨우겨우 부퉁 켜 안고 있던 내 온전치 못한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대답이었다.

시큰거려오는 코를 한 손으로 잡아 비틀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눈에서는 눈물이 틀어놓은 수도꼭지 마냥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드릴 말씀이 없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만 두 번을 반복하고 급하게 핸드백을 낚아채서 밖으로 나왔다.


아이와 함께 한지 7년이란 세월 동안 작고 큰 위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베풀어준 이러한 크고 작은 호의들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지금처럼 행복하게 성장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늘 회사에서 애엄마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이렇게 숨통을 트이게 해준 사람들 덕에 그럭저럭 7년을 잘 견뎌 낼 수 있었다.

아이도 가족이다.. 너무나 옳은 말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에게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아이가 온전히 성장하려면 역시.. 온 마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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