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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plica Nov 01. 2020

과공감, 과몰입 방지턱

다다익선, 거거익선. 공감력의 추천 사이즈는?




살면서 본 많은 문구 중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맞는 말 같다 끄덕여지는 한 문장이 있는데 ‘공감도 지능’이란 문장이다. 공감의 방향은 보통 밖으로 향한다.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귀 기울이고 나의 마음과 생각 역시 조정해 같은 눈높이에서 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하는 노력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그래그래 그렇구나를 외치거나 겉만 슥 핥는 그런 플라스틱 공감 말고, 진짜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아오는 찐공감은 그래서 지능이자 배려이자 애정이다. 온전히 나에 집중하고 내 행복만 좇기에도 충분히 빡빡한 이 세상에 타인을 향한 공감능력까지 갖춘다는 건 굉장히 아름다운 인간 고유의 기능이 아닐까. 없거나 행하려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지만 우아하고 괜찮은 사람들이 가진 따뜻한 상위 스킬처럼 말이다. 하여 되도록 공감의 주파수가 비슷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고 나 역시 상대에게 충분히 사려 깊고 따스한 사람이고 싶다. 



공감능력도 능력인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느는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삼십 대의 인간관계란 이제 어느 정도 깔끔하게 라인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깊었던 관계는 세월의 복리 속에 더욱 돈독해지고 애매하거나 서로 변화의 지점에 서있던 관계는 아쉽게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시점이라 그럴까. 정말로 내밀한 사람들 위주로만 시간을 보내서인지, 운전이나 외국어처럼 하면 할수록 경험치가 늘어서인지, 점점 나는 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좋아하고 나와 비슷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일과 일상, 지질한 감정 하나도 참 소중하고 커다랗게 다가온다. 가끔은 내 앞에 앉은 상대가 공감을 바라고 시작한 이야긴지도 실은 잘 모른 채 공감 버튼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마음이 완전 상했겠는데, 어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런 상황에선 나라도 그런 말 나오지, 하며 마음이 그렇게 기울어 버린다. 



잦고 강한 공감은 몰입을 낳는다. 친하고 소중한 사이일수록 네 일이 비단 너의 일만이 아닌 것이 된다. 네게 뜨거운 똥을 준 사람에겐 나도 더한 걸 되돌려주고 싶어 지고 네가 마음에 들어하는 후배면 나도 일단 긍정 필터로 그를 보게 된다. 네가 겪은 어제의 가슴 아픈 일에 나의 마음도 찢어지고 네가 내린 결정이 우리의 일상을 같이 흔드는 느낌마저 든다. 이제는 대개 비슷한 모양새의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몰입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지만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모든 일에 정도가 있다는 점이다. 깊게 공감할 줄 알고 쉽게 몰입할 줄 아는 이 기능은 한 사람의 장점이자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날카로운 양날을 가진 예민함의 특질 같은 거다. 공감력과 몰입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적정한 선에서 주고받을 때 그 효용이 가장 빛난다. 타인의 일에 과도하게 영향받고 공감하고 몰입했을 때 수신자의 다소 부담스러운 마음은 뭐 그렇다 쳐도 감정을 쏟는 나에게 돌아오는 감정의 여파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보낸 공감과 몰입은 내 앞에 앉은 그의 리액션에 닿아 내게 다시 돌아오면서 나 자신의 문제로까지 확장을 하는, 3D 돌비 서라운드의 입체적 경험이 된다. 정말 그랬겠구나-를 넘어 엇비슷한 나의 상황 혹은 그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의 뿌리까지 뒤 흔들며 더 큰 파장을 가져온다. 말 그대로 필요 이상의 감정 소모와 에너지 낭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태생이 감정적으로 적당히 건조하고 후천적으로 발달된 사리분별 버튼으로 공감의 적정량을 딱딱 맞춰 조절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적당히 공감하고 집중하되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낭비하며 멀쩡했던 나의 기분까지 내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공감과 몰입 기능이 발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기능이 잘 발달하지 못했단 점이다. 어찌 보면 상충관계에 있는 기능 아닌가. 공과 사를 딱딱 구분하고 팩트와 감정까지 잘 발라내 적절한 수위를 지킬 줄 알면 사실 제 아무리 소중한 관계어도 타인의 일에 그렇게 깊게 감정을 나누거나 빠져들지 않는다. 서글프게도 공감 기능이 강화될수록 이 정도의 버튼 역시 희미해진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에게 벌어진 일로 인해 나의 감정도 쉽게 가라앉고 나아가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의 상황에 과투영을 해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사람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감정량에도 리밋이 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정작 내가 나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써야 할 에너지가 축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슬퍼서 많이 운 날 의외로 깊은 잠을 자거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거듭하면 살이 빠지고 몸 어딘가에 이상이 오듯,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인간이 감정을 처리하는데 드는 육체적인 연료가 상당하다. 절대적인 시간이 많은 이십 대나 일과 업무 등 분배해야 할 인생 과업이 없는 한가로운 상황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할당된 투두리스트를 해내기도 빠듯한 하루하루다. 같이 모인 자리에선 한없이 서로의 대화에 몰입하고 이해해주다 집에 돌아와서는 기계처럼 그 버튼을 툭-하고 끄는 것이 순간엔 매정하고 좀 이상해 보일 지도 모르겠다. 보다 영속적이고 건강한 관계 그리고 내가 나를 잘 돌보기 위해서 그러나 꼭 필요한 연습이다. 얼굴 보고 위안을 건네는 나의 표정 하나에 따뜻한 온도의 말 한마디에 이미 공감과 몰입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서 까지 그 감정의 잔해물들을 안고 필요 이상으로 마음과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분리와 조절을 하는 연습이 잘 되어야 다시 건강한 나의 에너지가 채워지고 다음 상황에서 필요한 도움을 주거나 진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이 또한 선과 정도를 적절히 정하고 이를 지키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 관계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는, 딱 거기까지의 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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