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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plica Nov 01. 2020

예민러의 자가면역 강화를 위한 셀프 처방전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아주 대단한 깨달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예민함은 쩔 수 없는 필연이다. 정도와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저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겨지는 감정적 세금과도 같달까. 꼭 대단한 예민성을 타고나지 않아도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덕목에 부응하는 노력들을 하다 보면 무딘 사람도 날카로워지고 별생각 없던 일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들기 마련이다. 열심히 자기 삶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갈수록 역설적으로 신경 쓸 것들은 더 많아지고 기준 또한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에 따라붙는 세금처럼, 어느 정도의 예민함은 야속하게도 우리 일상이 된다. 선천적이든, 가족력이든, 후천적 발달이든- 우린 그렇게 일상 한 켠에 어느 정도 예민한 나와 공존하며 삶을 살아낸다. 



예민한 사람의 일상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대개 애로사항이 많다.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자극의 분류가 세세하고 민감하니 대체로 생각할 거리가 많고 평균 이상으로 섬세하기에 이를 쉽게 툭툭 떨쳐내기엔 그 잔상도 길다. 꼭 정신과 상담 기록이 있어야만, 혹은 공황장애, 우울증 같이 서슬 퍼런 진단서로 나의 증상이 규정되어야만 마음이 힘드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약을 처방받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작정하고 받을 만큼은 아니어도 끊임없이 주위 상황에 의해 스크래치가 나는 내 마음을 다잡고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아주 일상적인 순간 속에도 까끌까끌하게 돋아나는 감정들을 삼키고 때론 아닌 척해야 하기도 하는 모든 과정들이 참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예민하고 삐딱한 자아가 절대적 단점이나 고쳐야 할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의 익스큐즈로 쓴다거나 그런 나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예민함은 벼슬이 아니다. 자신의 예민함을 비관하거나 단점으로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자부심을 부린다거나 편치 않은 나의 단면들을 타인에게 배려 없이 들이대는 것도 실례가 된다. 대개 내가 예민한 만큼 타인의 감정도 세세하게 투영할 줄 알기에 안하무인으로 예민함을 벼슬처럼 떨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믿고 싶다만 자각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진 않은지 점검하고 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내가 나를 돌보고 내 삶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예민함의 테두리에 과도하게 몰입해 나의 확장성을 가로막고 있다거나 생각의 틀을 가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 역시 있다. 가진 기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펼쳐나가기 위해 우린 예민한 자아를 더 꼼꼼히 돌보며 살뜰히 챙겨야 한다. 



예민하고 삐딱한 자아를 돌아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의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다. 이 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사람이라면 최소 20년이 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을 거다. 관성 그리고 원심력에 의해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예민한 사람은 더 예민하게, 삐딱선은 포물선을 더 짙게 드리우기 마련이다. 스스로 노력해서 조정 값을 옮기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예민하고 날카로운 자아로 다듬어지기 쉽단 이야기다. 예민함의 영역이나 개개인의 특성은 모두 다른 것이어서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한 줄이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아주 대단한 깨달음



예민한 나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아껴주고 사랑하라는 마음의 각오 한 줄을 기대했을 수도 있겠다. 잘못한 거 없으니 다 괜찮다고, 조금 달라도 좋으니 나의 속도 그대로 가도 좋다는 그런 위안과 안도의 말들 말이다. 내 생각은 반대다. 그건 예민하고 삐딱한 자아에 대한 매우 일차적인 솔루션이다. 그렇게 감정만 다독인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괜찮아지는 구석은 글쎄, 많지 않다고 본다. 일시적인 위안은 물론 얻을 수 있다. 실제로도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거나 자책을 할 포인트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괜찮다 괜찮다 하며 스스로를 감싸 안아주는 것이 잘못된 접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 역시 기대할 수 없다. 다음 날 눈뜨고 출근만 해도 또 다른 외부 자극들이 예민한 나를 찔러댈 것이고 인간관계의 문제라면 나를 백날 다독여봤자 상대방은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사건의 핵심을 빙빙 맴돌 뿐이다. 그렇게 끝없이 회피하며 본질을 마주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면 이런 방법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나의 경우 그런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더한 허망감이 몰려왔다.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내가 나에게만 다그치는 꼴이 되는 거다. 좋고 따스한 위로도 한두 번이지 반나절만 지나도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을 텐데 난 문제없어, 이대로도 충분해하는 대책 없는 마법 주문은 글쎄, 삼십 대엔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결국엔 내 마음의 관점에 변화를 줘야 한다. 타고난 기질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영역이라 내가 노력한다고 나의 삐딱함과 예민함이 줄어든진 않는다. 하지만 필터를 바꾸는 노력으로 생각의 반경을 넓혀보고 관점의 구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충분히 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나 꽤 건강한 방향으로 자기 주문과 암시를 꾸준히 걸며 자꾸만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나의 민감도를 조정해 나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 그 주문의 핵심은, 나 그리고 나의 인생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이었다. 예민한 자아에게 내리는 처방전에 갑자기 겸양과 겸손이 미덕을 끼얹는 것 같아 낯설어보일 수 있다. 겉만 다독이는 위로를 하지 말자더니 왜 갑자기 현실 자각 타임을 갖자는 건지 의아할 수도 있다. 타고난 예민함과 섬세함이 자꾸만 나노 단위로 강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자아 그리고 그런 내가 꾸려가는 나의 삶에 너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나의 성실함 때문이었다. 누군들 자기 인생이 소중하지 않겠냐만 예민하고 꼼꼼한 구석을 타고난 덕에 나는 나의 인생을 꽤 특별히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니 깨닫기보단 인정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에너지를 투입하고 신경 쓴 만큼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어찌 보면 순진한 정의감이었을 수도,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노력한 만큼 그 어귀쯤은 성취를 이루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일종의 오만함일 수도 있겠다. 영원히 깨지지 않고 다치지 않고 열망대로 삶을 운용할 수 있다면 참 축복받은 인생이겠지만 모두가 알듯, 삶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심지어 매 해 스스로를 다그치며 까닥스럽고 높은 자기 기준에 맞춰 달려온 이들이라면, 이쯤에선 보는 눈높이와 렌즈와 관점을 바꿔볼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특별한 사람도 아니라는 아주 대단한 깨달음을 말이다.



진행 중이거나 목표한 일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날카로워지는 것도 매사 신경 쓰는 일에 완벽을 기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열심히 준비하는 건 내가 나를 존중하는 의미 정도지 꼭 결과까지 한 세트로 완벽하게 성과를 연결 지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방에 성공할 거야, 로 일관해온 건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훨씬 꼼꼼하고 치밀하게 뭐 하나를 해도 완벽하게 하는 걸 좋아했기에 그 긴 담금질의 과정 동안 기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물의 진정성과 가치를 몰라봐주는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미워졌고 기껏 열심히 해놓고 슬럼프에 빠지곤 했다. 때로 결과가 좋게 나와도 그건 내가 빡세게 노력하고 예측한, 당연한 엔딩이었기에 충분히 즐거워하지 못했다. 사실 엄청 기뻐해도 좋고 주변에 나 이만큼 해서 이뤄내서 기쁘다고 더 크게 말해도 좋을 텐데 내가 예측한 당연한 시나리오의 결말일 뿐이므로 남들이 축하를 해줘도 에이 뭐-하고 겸손이란 바구니에 그 예쁜 감정들을 꾸겨 넣었다. 내가 별 거 아니란 생각으로 임했더라면 나도 그냥 더 충분히 그 무드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뭐가 그렇게 고귀해서 순간을 다 누르고 참았다 싶더라. 실패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응당 결실을 맺어야 할 나의 프로젝트가 시시하게 끝나버리거나 기대치에 못 미쳤을 때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고 침잠되는 이유 역시 같은 메커니즘이다. 별로 대단할 거 없는 인생이고 그게 평균이고 당연한 거란 호방한 마음가짐이었다면 적당한 선에서 무드 좀 타다 훌훌 털어버릴 일인데 너무 내가 나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긴 대가는 역설적으로 나의 마음과 에너지를 파먹었다. 





스스로를 갑자기 하대하거나 막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용기를 말하는 것일 수도, 내가 나를 좀 더 편안하게 대해 주라는 따스함일 수도 있겠다. 예민한 만큼 매사 남을 배려하고 까탈스러운 만큼 균일한 밀도로 노력했던 나의 인생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는 거다. 일생을 쫀쫀하고 피곤하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들볶고 살아온 이에겐 이 대단하지 않은 마음가짐 하나가 굉장히 큰 차이가 될 수 있다. 나의 일과 인생, 지금 꽂혀있는 이 일이 실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진심 닿는 만큼 열심을 다하고 그 안에 즐거운 내가 있음 그게 다라는 그 대단한 깨달음. 스스로도 피곤할 만큼 예민한 자아를 지닌 당신에게 권해보고 싶은, 내가 나를 다스리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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