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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plica Oct 20. 2020

한혜진과 20년

커리어를 가꿔가는 과정 위에 우린 모두 서로의 선배이자 후배 아닐까




요즘의 모델 한혜진은 꽤 호감이다. 무쌍의 날카로운 눈매와 도드라진 광대, 기다란 몸선의 여타 모델과 다를 바 없는 원년 멤버라 생각했는데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외모에서 풍기는 까칠하고 쎄 보이는 차가운 인상 대비 여러 프로그램에 묻어나는 모습들은 은근 허당인 데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나 역시 뭐 열성팬까진 아니더라도 그녀의 쿨하고 직선적인 애티튜드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녀를 예능퀸 반열에 올린 혼자 사는 예능 프로그램은 점점 고정 패널들의 회식 분위기, 노골적으로 화제를 염두에 두고 출연하는 노잼 출연자들의 역습으로 점점 흥미를 잃어가 어지간해서는 잘 챙겨보지 않게 되었는데 주말 밤 우연히 그녀의 모델 데뷔 20주년 기념 하와이 여행기를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미디어에서 가장 보기 싫은 광경 중 하나가 연예인들 사연팔이다. 아무 멘탈이나 덤빌 수 없는 직업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공허함과 인간적 외로움도 모르는 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쩔 수 없는 숙명이고 모든 연예인들이 다 부자는 아니라지만 요즘 같은 불황과 저성장 시대에 그래도 유명세와 팔린 얼굴 덕에 비교적 손쉽게 부를 쌓고 실패를 해도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한 업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다못해 아이 부모 할 것 없이 그들의 가족과 매니저까지 유명인이 되고 광고를 찍고 인기를 얻는 세상 아닌가. 연예인 세습 이슈까지 제기되는 판국에 한정된 전파에 굳이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팔이를 보고 싶은 마음은, 미안하지만 없는 편이다. 시청률과 이슈를 갈구하는 방송사와 실검 그리고 화제가 필요한 소속사의 합작품으로 꽤나 빈번하게 연예인들 사연팔이가 전파를 타곤 하는데 여지없이 채널을 돌리곤 한다.  뻔한 레퍼토리에 질릴 대로 질렸고 직장인의 렌즈로 보노라면 그 정도 프로의식도 없이 인생 쉽게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 찾아보라 말해주고 싶을 정도. 각설하고 이 날 에피소드는 모델 한혜진과 김원경이 하와이 이 곳 저곳을 다니며 데뷔 20주년 기념 셀프 화보를 찍는 모습 이모저모를 담았다. 재밌다기 보단 하와이 풍경이 너무 예뻐 멍 때리고 보고 있다 방송 말미에 데뷔 20주년이 어떤 의미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담담히 소회를 밝히다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앞서 맹비난했던 흔한 연예인들의 눈물팔이랑은 약간 다른 결의 감정이 밀려오더라.


어린 나이에 데뷔해 2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을 못되고 치열한 패션 바닥에서 탑 클래스를 유지한단 자체가 사실 굉장한 자기 관리 또 보통내기가 아닌 멘탈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항상 화려하게 주목받고 선망과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파는 것이 업의 핵심이다 보니 저 정도 짬이면 아닌 척은 해도 으스대고 제 잘난 맛에 살 법 한데 그렇게 어렵게 지켜온 본인의 업을 쨌든 외모, 가진 껍데기로 일하는 직업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는 한정적이란 말로 덤덤히 표현하는 모습에 되려 인간적 성숙함이 배어 나왔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지나고 나면 미화가 되기도 하고 특히나 이런 에피소드에선 더 멋있는 멘트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난 20년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며 모델로서 보낸 지난 세월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에서 가식이나 포장보단 자기 일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하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지켜보던 여자 패널들 다 과몰입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 보면 약간 연예인들 공통의 외롭고 허무한 감정을 터치하는 말 같기도 한데 왜 일개 평범한 직장인인 나의 마음에도 울림을 주는 건지.


한해 한해 살아갈수록 세상만사 또 사람 감정과 마음은 비슷해서 일까. 외모로 평가를 받는 직업도, 껍데기를 우려내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다만 자기 업에 소신과 믿음을 가지고 욕심껏 달려온 인생 선배의 솔직한 멘트에 이상하게 공감이 가던 밤이었다. 자료화면으로 흘러나오던 뉴욕 활동 시절 어리고 앳된 그녀의 모습들이 나의 초년 시절 그리고 훗날 돌아볼 오늘날의 나와 겹쳐지면서 이상한 심정적 몰입을 경험했다.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 차, 순식간에 불어나버린 숫자 앞에 약간 또 다른 결의 중압감을 느끼고 있던 요즘이라 그런 걸까. 다른 차원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 날로 빡세지는 셀프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 허나 진지한 동시에 또 재밌지 않으면 안 되는 쩔 수 없는 나의 욕심, 그리고 컨트롤이 불가능한 조직생활 안에서의 끊임없는 챌린지들까지. 전혀 다른 업이지만 거진 두 배가 되는 세월을 관통한 그녀의 소회가 잘 먹고 잘 사는 연예인들의 흔한 신세한탄으로만 다가오지 않던 이유 역시 그 안에 궤를 같이 하는 커리어에 대한 무게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 업계에서 아주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의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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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적어둔 날 밤, 그녀의 결별설과 함께 잠시 프로그램을 하차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약간 사적인 감정이 섞인 눈물이 아니었나 싶어 김이 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다만 그럼 또 어떠하리. 어떤 남자와 어떤 연애를 하고 어떤 이별을 하든, 빡센 패션 바닥에 탑클래스의 위치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자기 기준을 세우고 그에 부끄럽지 않은 매 시즌을 채우며 그 안에 성취하며 존재했을 모델 한혜진의 20년에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홀로 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며 끝없는 생각의 띠를 걷고 있는 10년 차 직장인인 스스로에게도 역시, 요즘의 고민 그리고 오늘 겪은 좋지 못한 일들 모두 다양한 높낮이의 성장 과정 그리고 훗날의 나를 다질 의미 있는 질곡일 거란 위안을 건네며 잠을 청해 본다. 더 괜찮은 시간과 기회 그리고 그를 오롯이 누릴 내가, 앞으로의 날들에 서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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