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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훈 Oct 27. 2022

백작의 노‘人’ 이야기

젊은이, 노인 모두가 싫어한다는 노인 이야기 01

젊었을 땐, 60을 넘기면 하던 일도 모두 끝나고, 다 내려놓고 살아가게 될 것으로 알았다. 생각보다 그 나이에 빨리 이르러 세상을, 인생을 바라보니 아직 어마어마한 30여 년이 남아있다. 이 사실이 참으로 감사인지 저주인지 헷갈리며 낭비한 몇 년이 과거의 전부와 같은 낭패로다. 일컫되 네 마음대로 해라. 살아라. 그려라. 써보라. 한 번쯤 관계를 벗어나고 관념을 넘어서 경계선에서 조금 더 멀리 가보자~


프롤로그 prologue


나는 백작이다. 물려받은 유전적 예술 끼를 주체 못 해, 감각적인 모든 것에 평생 끌려 다니다, 30여 년 종사해 온 광고와 마케팅 업계의 지식과 경험을 모아 지혜로운 마무리와 쌓여가는 말년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선언했다. 미술, 미술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것이 평탄치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에 음악과 미술 즉 딴따라를 술과 비벼서 청춘을 말아먹다가 몇몇의 대학을 거쳐, 공군 입대 후 참모총장 당번병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최고 권력층의 주변을 산책하며 나름 기획 적 사고와 체계적인 관리를 경험하게 된다.

      

제대 후 입시 미술학원이라는 곳에 등록, 6개월 만에 석고데생 300여 장, 입체구성 80여 장을 폭풍처럼 그려 내며 뒤늦게 홍익대학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에 입학, 그동안 나의 제대를 기다리며 홍익대 미대 금속 공예과에 진학, 이미 4학년이 된 지금의 아내와 결혼, 품절 남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당시 광고 고시를 뚫고, 서울우유, 광고대행사 등을 거치며 최다 크리에이터 연속 수상, 조선일보 광고대상, 한국 광고대상, 1회 아트디렉터상 등과 국내 1호 국제광고인(AAA) 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요미코 CD과정을 연수하였다. 96년 소위 억대 연봉으로 신흥 광고대행사에 스카우트되어 1년 만에 80억 매출의 광고주를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영입하며 당시 경쟁사였던 국내 최대, 최고의 ‘ㅈ 기획’과는 추후 5번 경쟁에서 전승하는 이력을 썼다.   

  

비즈니스 보루네오, 대우아파트, 한솔 018, 영종도 미단시티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시에 파인아트 갤러리 샵, 패션 브랜드 도나 오라 ON&OFF LINE 사업을 병행하며 ‘O.X. 인사이트’라는 공격적인 사명으로 

향후 10~15년 후를 예측하는 비즈니스 키워드를 남발하였다.   

  

포장해서 멀티 플레이어, 20세기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프랑스 백작, 광고계의 전설, 마켓의 방화범 등의 별칭으로 낮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과 술을 비비다가 드디어 2015년 말, 두 번의 예고편을 무시한 죄로 

대장암 2기 말을 선고받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래도 절묘하게 3기 직전, 실형 아닌 집행 유예로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뼈저린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뇌, 고민이 많았다. 내가 선택하고 실행한 일들에 대해선 결과와 관계없이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들은 왜 이리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망하더라도 좀 더 저질렀어야 했다. 결국 저지르지도 못하고 노인이 되었다. 후회하든 않든 

인생은 굴러가고 오늘은 또 간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과연 무얼까. 60이 넘어 노인이 되었어도 아직도 모르겠다. 

한 동안은 뚜렷했었다. 어렸을 땐 음악. 밴드 그리고 더 일찍이 놓쳐버린 미술, 화가. 아티스트. 예술가. 40대 때 광고회사 대표 외에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뭔가 대리만족으로 헛헛함을 채우려다, 한국 화단과 화가의 실태에 실망한 후로 사실 방향을 잃었다. 이후로 광고업인 생업이 천직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 먹고사는 일이 그저 창작 아닌 창작 대행업임에 뼈저리게 되면서 흥미를 잃어갔고, 서서히 침몰해 갔다. 몇몇 사업은 소극적이었고 자기 주도형이 되지 못했다. 

     

화실 선생 시절. 거의 10여 시간?을 먹지도 않고 연신 웃으면서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입가에 웃음을 띠웠었다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생각난다. 그래. 그동안 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이렇게 또 이렇게 망쳐왔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나만 좋아한다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확실하고? 나는 여전히 번민을 하고 있다. 시장을 예측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심리를 읽어내고, 문화를 주도한다고? 예라~잇 한심한 놈. 처음부터 목표를 보면 안 된다. 미래는 가슴에 품고 출발점을 봐야지. 


60세 넘어도 일할 수 있는 시대라면서, 60세가 되기 전 은퇴시키는 세대 아니요?      


잠깐 전만 해도

이 심장 속에선 영감과 증오와 희망과 사랑이 뛰고

생명이 솟구치고 피가 끓었건만 지금은 폐허가 된 집처럼 

모든 것이 어둡고 조용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알렉산드르 푸시킨_러시아 국민시인


난 이미 노인이 된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이다. 참 평생을 지겹게 따라다닌다. 여러 가지 불리한 것이 많았던 세대라고 주장하지만, 유, 불리는 공존하는 경우가 잦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낀세대라는 것만은 인정된다. 그러나 진짜 큰 문제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며 베이비부머 앞쪽의 선배님들과 나도 어언 60세를 

몇 해 넘겼다. 100세 시대를 살면서 과거와 다른 환갑, 나이를 잘 인식하고 생활하고는 있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유전적으로 심어진 유전인자 같은 은퇴의 시기를 넘겼다는 인식 또한 무시 못해 그로 인한 

방황이 나름 상당하다. 그냥 나이 자셨으면 물러서고, 내려놓고 젊은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도 현명한 

어른다운 처사이겠지만, 축복인지 저주인지 애매한 생명연장으로 앞으로도 몇십 년을 놀고, 먹고 마시고 

여행 다니며 살기엔 너무 길고 허망하지 않나. 사실 쌓아온 경험과 지식과 지혜 즉 노하우가 이 시대에 결코 필요 없는 자산인가. 의문이 생기던 차 우리들 베이비부머의 자식 세대인 에코 세대(1979년~1992년) 또한 부모세대와 똑같은 환경과 상황적 굴레를 유전받아 같은 고충을 겪고 있다 하니 이대로 방관자로 두고 볼 수만은 없겠다 싶어, 글을 아니 글로 쓰는 그림을 그리려 한다.     


어쩔 수 없이 말이 길어 꼰대 소리 듣는 김에 나를 좀 더 말해보려니 참고 들어주시게.

나는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광고업계에서 20세기인 1990년대에 이미 1억 고연봉으로 각종 광고,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회사에서 스카우트되었던 소위 잘 나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대형 프로젝트, 경쟁 프레젠테이션, 각종 공모전 수상 등은 여기서 나열하지 않고 내가 가진 어떤 자질로 이 글을 쓰는 지만 밝혀 둔다.


그 하나는 홍익대 시각디자인 전공자의 ‘시각’

또 하나는 광고와 디자인, 마케팅 멀티 플레이어 35년 경력자의 ‘통찰’

그리고 59년생 베이비부머의 샌드위치 세대 속칭 낀 세대의 복합적 ‘통합’   

이 세 가지의 관점과 경험으로 쌓인 노인 사람의 이야기를 

나의 두 딸과 현재 다분야의 크리에이터 또는 그 지망자들에게 아낌없이 바치렵니다.

(단 나의 노하우나 지침은 객관적, 산술 통계적이지 못함을 사전에 밝혀둡니다)

     

어쨌든 이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글, 말, 주장이 될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알고도 불편해서 굳이 외면하는 일이기에.


분명히 노인들도 젊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이 존재했으나 어느새 늙는다. 그것 자체는 슬픈 것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마치 원래부터 그러하였듯 생각하는 착각과 그것을 인정하는 나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    

파스칼의 ‘중생 론’에 심취한 중학생이었던 나의 이상은 현실에서는 대부분 한쪽으로의 ‘괴물’이 된다는 가설 속,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을 위한 방패와 분장 술로 쓰이고 그 이후 평∙범 이상으로 살다가 후반부에 평∙범 이하로 내려왔다. 

     

난 나의 감각이나 감성 등이 가치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자산이 된다는 생각과 더구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한 번도 못 해본 것 같다. 때가 된 후에 들여다보니 이미 60세를 넘겼고, 정비하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큰 병도 3 연타를

치는 상황에 더하여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구덩이까지 파여 있어 결코 녹록지 않았었다고 핑계한다.    

  

그러나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다

    

50대 중반에 ‘암’이 왔다. 그에 대한 투병과 사업을 위한 정비, 정리를 하다 보니 

귀싸대기 맞은 듯한 5년이 무중력으로 지나갔고 순식간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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