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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훈 Oct 27. 2022

노 ‘人’에 대하여

젊은이, 노인 모두가 싫어한다는 백작의 노인 이야기 03

노인, 노인 사람 한 명이 도서관이란 말이 있다. 아니 있었다. 현 세상엔 스마트폰 속에 도서관 하나가 들어있으니 그 가치가 없다고 할까. 이에 나는 어느 날 이 뻔하고 재미없을 이야기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노인 사람의 생각과 지식, 지혜, 철학. 노인과 늙음, 노인과 젊음, 사랑과 일 그리고 100세의 기회와 저주 등등.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시류에 쓸려 정신없이 사는 동안 노인으로 무장해제된 지 몇 년째. 지병이 더 해 지다 보니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순한 노인이 되어, 활동해 온 세월보다 더 길지도 모를 30년 좀비 은퇴생활의 초입에 서 있다.      


인간의 존엄은 쓸모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공감하기 때문이지 동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와 당신도 늙는다는 사실 말이다.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인 ‘섭생’과 ‘주거’만으로 살아간다면 인간다움이 펼쳐지는 삶이라 말하기 어렵다.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람 사이의 정서가 배려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 하나는 딱 한번 산다는 것이며, 가장 늙지 않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이다. 치매 이야기가 아니다. 노인이 많다는 시대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철나지 않는 어른이만 득실 하다.  

    

태어난 곳이 의미는 없지만 59년 7월 더운 여름, 충청남도 대전시 대흥동에서 태어나 2살 전, 서울 동소문동으로 이사 온 후 주로 성북구 성북동 언저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양면이 존재하는 시대. 그 격차가 널뛰던 시대. 불행이 있으면 행운이 따르던 차원적 조화를 깨닫기에 나는 너무나 부족했으나 행복했던 시절이다. 

30년 전으로 커밍아웃할까 해. 그러나     


젊게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나이는 나이다. 인정한다. 반항도 거부도 아니다. 늙었으나 늙지 않았다. 젊었으나 젊지 않다. 어리고 젊다가 나이 들어보니 이제 서야 젊은 걸 알 것 같네. 로망을 지켜야 절망을 견디고 노망을 넘긴다고?      


굳이 숨 켜야 할 정체성은 아니더라도 괴짜, 지독한 에고이스트라고 분류되면 결국 외로운 늑대로 살아야 하기에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었다. 난 사실 뼈 속까지 자유인이다. 그래서 난 어떤 것이든 종교와 가족까지도 

구속받기 싫어한다. 얽혀서 왜곡되어 현상유지되는 모든 것들 이념, 혈연, 학연, 지연과 유수한 지식에 상식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싫다. 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제도의 속한 환자라 굳이 가족 포함 모든 관계의 굴레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에만 기준을 넘어 변동이 적용된다. 그러나 결국 궁극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가족애 던, 우정이 던, 이성이 던 어차피 얽힌 인간이라 자신이 속하게 된 집단에 휘둘리는 것이 인생이며 삶이라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인정하고 무릎을 꿇지만, 집단 합리화에 적극적이며, 심지어 앞잡이까지 하면서 살기는 싫었다.     


일평생을 평형, 균형감으로 살아왔다. 아니 솔직한 표현으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의 지인들은 자기편인 줄 알고 있다가 어느 날 생경한 나를 만나게 된다. 타인의 의견, 생각, 표현을 존중한다. 단 그 양비가 도를 넘는 지경에 이르면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한도 내에서 넘치게 산다. 

그 경계선, 무엇을 위해 고집하는 가.     


노년의 문화를 바꾸자!

100세 시대엔 이생삼생을 기대하라

장렬 한 전사를 꿈꾸다

놀기만 하며 살기엔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다 

Are you still hungry?     


나의 아버지의 오랜 동료이고 친구였던 분이 돌아가셨다. 향년 88세. 그 친구 분의 부고를 여러 지인들께 

전하면서 큰 병도 아닌 데 제대로 된 입원, 치료도 없이 떠 난 것을 통한해하신다. 발이 아파 모임에 못 나간다는 통화가 마지막이었음을 무척 당황, 황망해 하신다.      

지난해, 나의 고등학교 때 친구, 그렇게만 말하기엔 부족한 젊은 시절 최고의 친구들. 요즘 말로 절친 인 

친구가 모임 참석 확인 통화 3시간 후에 사망했다. 향년 59세. 교통사고, 살인강도도 아닌 심장 마비. 

지병이 없진 않았지만 가벼운 운동 뒤의 황망 한 불행이었다.    

  

아버지와 나. 62세나 89세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돌연사가 당황스럽긴 해도 그렇게 놀랍기만 하지 

않는 나이 군에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언급한 두 고인의 사례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인들은 조금 심한 감기에도, 조금 숨 가쁜 운동에도, 충격과 스트레스 그리고 가벼운 헛발질과 실수로도 삶이 끝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다. 물론 젊은이도 아이들도 그런 사고는 발생한다.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는 표현이겠지만 난 요즘, 노인들 급사의 이유 중 하나가 ‘무리’라고 생각한다. 

요즘 노인들이 좀 나댄다. 그 연세에 즐기면 쫌 어떠냐. 내 청춘을 돌리도~ 열심히 살아온 당신. 떠나라~ 

인생은 나이는 숫자일 뿐! 6학년, 7학년, 8학년 심지어 9학년까지 나댄다.   

   

그러나 노인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다 싸가지고 집을 나온, 기차에 올라타 묻지 마. 식 음주가무를 즐기는 관광객은 아니다. 의학의 발전이 준 여벌 나이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할 일, 해야 할 일이 있는 10년에서 30년까지의 시간이 주어진 '성숙하고 생산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30년이면 한 사람의 인생 절반이 넘는다. 이 시간, 이 기간을 관광객으로만 살다 객사할 것인가. 복잡한 것이 싫치? 단순한 것이 좋치? 생각하기 불편 하지?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표현하면 물 흐르는 대로 순리대로 살다 가면 다 좋은 것 아니냐. 는 낙관 및 포기론. 물 흐르는 대로 흘러 시궁창으로 갈지. 강으로, 바다로 갈지 상관없다? 그것이 호방한 남자의 객기인 지 기개인 지, 나는 논쟁하기 싫다.    

  

물길을 바꾸려는 치기를 부릴 용기도, 호기도, 체력도 없다만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수반한 소신을 밝히는 어른이 되고는 싶다. 오래 살아 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록 상처뿐인 인생의 계급장과 현명함의 훈장을 달고 있는 조금은 더 성숙해진 사람으로서, 그 노력과 역할은 하면서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노인의 삶, 어떻게 살 것인가. 투정하긴 싫으나 무뎌지는 것 또한 싫다. 무능과 부족함을 현명으로 도피함으로 무너져가는 진정한 노화. 노인에 대한 변명이 되지 않기만을 바랜다.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질서의 체제에서 황망히 떨어져 나온 시점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시작된다는 도매급 처분에

둔하게 반항하는 억울한 1인 시위자로 몰리는 것이 사뭇 답답할 뿐이라는 것이다.   

   

시각과 청각, 말초신경이 죽어갈수록 절절함에 깨어나는 디테일의 세포. 포기하지 않아서인가. 철이 들지 않아서인가. 음악이 젊었을 때 보다 섬세하게 들린다. 이런 정서가 척하는 건가? 고상 떠는 건가? 기준이 애매한 수준의 나라라고 불평하면서 오랫동안 헷갈려했다. 막연히 유럽의 여유가 부러웠다. 그것도 사대주의 인 가.   

세상에 한 명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잘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만 인간의 사랑이 착각과 오해에서 오는 혼돈임을 감안하면 굳이 따질 것이 없다. 시간이 30년은 더 있다고 생각해보라. 은퇴하고 여가 생활하며 산다는 생각을 버려라. 여행도 좋고 친구들 만나 맛난 것 먹는 것도 좋지만 그것밖에 없으면 안 된다는 것. 뿐이다.    

  

나이가 들면 둘 중에 하나가 된다. ‘어르신’ 아니면 ‘꼰대’. 자기 생각, 자기주장, 자기 이익밖에 모르면 ‘꼰대’이고 다른 사람, 남의 입장, 전체를 이해하고 배려가 생기면 ‘어르신’이다. 뭐가 되던 선택은 자기 몫이다. 

친구들. 가능한 ‘꼰대’가 되지 말자~


불행히도 커밍아웃하자면 내 부모님도 ‘꼰대’가 되셨다. 그래서 화나고, 매우 슬펐다. 

존경과 사랑이 넘쳤던 분들이 그렇게 되신 것이 첫째로 슬펐고, 거기에는 자식의 무능이 한몫한 것 같아 

두 번째 슬펐으며, 세 번째는 내가 그렇게 될까 봐 슬프고 매우 무섭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 

     

노인은 노련한 인간, 성숙한 사람을 뜻한다. 나를 억제하고 또한 풀어놓을 통제력을 갖췄을 때 비로소 

‘어른’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정관념. 그 고집에서 탄력적이어야 비로소 ‘어른’으로 태어난다. 

저절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22년 기준으로 사회적 노인은 65세에서 67세로 규정되며 곧 75세로 상향될 듯하다. 고로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로 우기면 노인 맞다. 어쨌든 노인과 젊음에 대한 

주제의 이야기는 70세가 넘으면 쓰도록 하자~      


원초적인 불행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라 우리는 감사에 인색하다. 그래서 요구는 더 커졌다. 젊음도 그러한데 노인 세대가 이에 앞장서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배려 심이 없고 뭔가를 해주기 바라면 노인이다.   

   

‘사양’의 힘. 그것이 이성이다. 노인이 되면 점점 더 본능적이 된다. 자기 권리의 주장이라지만 동물과 점점 

닮아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감사를 말하고 거절의 미덕을 갖추며, 끝없이 읽고, 쓰고, 상상하는 능력을 

본능처럼 잃어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노인이 아니고 인생의 풍요는 그런 것이며 그것은 독서에서 온다 하니

신문이라도 읽자. 읽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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