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언니 아직 여기 있었네? “
”오래간만이네, 여기 행사야? “
”응응. 이번에 행사 여기야. “
마트에 새로운 행사가 생길 때, 가끔 외부에서 파견되는 직원들이 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이주일 정도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키위 행사하는 이모님은 마트의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과장님아! 오랜만이야. “
”여사님, 오셨네요. 안 그래도 다시 이 일 한다고 들었어요. “
”응- 이번주 키위 팔러 왔습니다. “
”네-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과장님과도 친해 보였다. 싹싹하고 안정적인 톤으로 목소리가 크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고 깔끔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있었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제프리 왔네. “
”제프리요? “
”유명해, 전국으로. “
”그래요? 그렇게 유명하세요? “
”마트, 여기 업계에선. 유명해. 홈쇼핑 매출 뛰어넘은 사람이야. 저 사람이. 판매왕“
이모들 사이에선 유명인이었다. 유통업계에선 유명하다고 했다. 밖에서 봤다면 그냥 평범한 아주머니였다. 하관이 널찍하고, 눈은 매섭게 크다. 코볼이 넓고, 광대도 각진 모습이, 지나온 세월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강건하게 잘 넘겼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강단이 있고, 어디 하나 주눅 들지 않은 그런 단단한 얼굴이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다. 흔한 기가 센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런 과일이모는 홈쇼핑 매출을 뛰어넘었고, 성격이며 외모며 시원시원하고. 맡은 물건은 완판을 시킨다며. 부르는 것이 일당이라고 했다. 일을 잘하는 덕분에 이리저리 스카우트제의와 함께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돈으로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다시 판촉행사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 잘하네. “
”안녕하세요. “
”안녕. 동글이라며? “
키위이모는 내 옆에 있었다. 밝게 웃는 이모에게서는 좋은 향수 냄새와 달달한 키위냄새가 났다. 판매를 잘하던 호떡 이모에게는 달달하고 기름냄새만 났었다. 호떡이모는 식품을 팔 때, 향수나 화장품 냄새가 너무 짙으면 판매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나에게 말해주던 것이 기억이 났다. 과일이모는 호떡 이모와는 달랐다. 평범하게 생긴 과일이모에게는 다른 이모들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부담감이 없었고, 친근했지만 마냥 쉽지 않은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과일이모는 나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만 있는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쇼호스트나 유통업 쪽에서 일할 생각 없니? 나 알선도 해주고 있거든. “
”저는 대학등록금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하는 거라서요.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학 가봤자, 등록금만 내고- 취업도 못할 텐데. 아깝지 않아? “
”네? “
”다들 돈을 우습게 여겨. 어떻게 벌든 돈은 돈인데. 우리가 하는 일 당당하고, 페이 좋잖아. “
”이쪽으로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해봐서요, 생각해 볼게요. “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일하는데, 이 정도면 타고난 거야. 잘 생각해 봐. 아직 어리고, 얼굴도 보니까, 살 조금만 빼서 화장 잘하면, 화면빨도 잘 받겠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 “
가볍게 받아 든 두꺼운 명함에는 과일이모의 은은한 향수냄새가 베여있었다. 향기로웠다. 웃는 이모는 나에게 명함을 찔러주고는 다시 과일 코너로 가고 있었다. 과일코너로 가는 이모의 뒷모습은 가벼웠고 친절했다. 주변인들에게 정답게 나누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그 뒷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그런 이모의 뒷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돈을 우습게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떻게 벌든 떳떳한 돈이니까. 이 일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자부심도 있었다. 물건이 팔리는 개수를 셀 때마다, 어떤 손님이든 잘 대응하는 나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업’이 아닌 대학등록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내 대학등록금은 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나의 꿈은 무엇이던가. 당장에 일하는 것에 만족을 하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이 돈을 열심히 모아서, 나의 꿈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희미한 목표에 투자를 할까? 시간과 돈이 다 필요하다. 과일이모의 말대로 이 투자금은 제대로 회수는 되기는 할까? 시험을 칠 수는 있을까? 취업을 될까?라는 걱정이 생겼다.
”엄마. “
”왜 “
”나 휴학하고 고시공부 할까? “
”니 머리에 무슨 고시야. 취업준비를 해야지. 공무원준비 하던가. “
”공무원준비도 휴학은 해야 해. “
”조용히 해라. 우리 집 형편에 무슨 휴학이야. 그냥 한 번에 졸업해야지. “
”그럼 나 시험은? “
”학교 다니면서 합격하면 되잖아. “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돼. “
”왜- 티브이 보면 다들 대학 다니면서 합격하고 한다는데, 그 정도도 안될 머리면 공부 왜 해. 취업이나 해야지. “
”공부하기 위해서 휴학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
”차라리 놀기 위해서 휴학한다고 해라. 열심히 공부해서 안되면, 너 청춘, 시간, 돈 다 날리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니 “
”나 이렇게 졸업하면 취업이 쉬운 줄 알아. 지금 마트에서 버는 돈만큼도 못 버는데. “
”내가 너 마트에서 계속 일하라고 대학 가라고 했어?! “
엄마와 한참을 다투었다. 마트에서 일하면 돈을 번다. 또래보다는 많이 벌 수 있다. 적당하게 대학을 졸업만 하고, 계속 이 일이 가능하다. 나이 많은 이모들과 일하듯이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과일 이모 말대로 쇼호스트를 준비할 수도 있다. 길은 많았다. 갈래는 많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대학등록금을 벌고 있지만, 대학을 가서는 정작 원하는 시험공부조차도 못할 것이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친구들은 공부를 했다. 로스쿨을 준비하는 친구, 노량진에 들어가서 공무원준비, 사법고시 준비하는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여름방학 동안 알바를 했고, 학기 중에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학기 중의 공부에만 신경 써야 했다. 추가적인 공부를 하기에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잠을 쪼개고 쪼개어도 돈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고 있었다. 시간과 돈 사이에 갈등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더욱더 생각은 깊어졌다.
”휴학이요. 할 수도 없어요.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
”휴학도 있는 애들 이야기지. 아니면 진짜 너무 없는 애들. 그런데 어중간한 애들은 힘들지. “
”저는요? “
”어중간한 애들. 평범한 애들. “
”제 미래를 모르겠어요. “
”내가 돈을 진짜 잘 벌어. 그래서 모아둔 돈도 많으니 사업하겠다고 설쳤다? 그리고 다 날렸어. 근데 집이 폭삭 망할 정도 아니고, 그냥 있는 돈들이 다 사라지고 생활할 수 있는 정도. 우리 애들도 대학생이었거든. 적당하게 알바하는.“
”그래서요? “
”애가 휴학을 하고 싶대.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서. 근데 그게 졸업하고 하면 안 된다네. 취업공백이 생겨서. 근데- 내가 못하게 했어. “
”왜요? 휴학하면 오히려 돈은 안 들잖아요. “
”어중간하니까. 지금 벌어서, 대학 졸업시킬 수 있을 때 시켜야 하는데, 사이에 휴학해 버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니. 나중에 진짜 돈 없어서 복학할 돈이 없으면 어떻게, 졸업장도 못 따면 어떡하냐고. “
”아... “
”근데 기어코 하더라. 그리고 지금은 복학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
”저도 휴학을 하고 싶은데.. “
”그런데? “
”무서워요. 휴학하고 공부를 했는데 시험을 못 붙은 채로 복학해야 할까 봐. “
”그걸 걱정하면. 안 하는 게 맞아. “
”네? “
”실패할 거부터 생각하는 시작은,. 안 하는 게 나아. 나는 내 사업실패할 거란 생각 못했거든. 그래서 힘차게 시작했는데도 실패했잖아. 그런데 자신 없는 시작. 안 하는 게 맞지. “
”.. 그런데 하고 싶어요. “
”공부 잘해? “
”교수님들은 제가 잘한다고 했어요. 끈기도 있고, 성실하고, 성적도 그만큼 나오고. “
”그런데 “
”시험운도 있어야 하고, 엄마가 안될 거래요. 그냥 취업을 하래요. 취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
”엄마말이 신경 쓰이니? “
”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두려워요. 실패할까 봐"
”엄마들도 자식 몰라. 나를 봐. 내가 우리 자식이 휴학할 줄 알았겠어? 복학 안 하고 버틸지도 알았겠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무언갈 열심히 준비해.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아. 본인이 강행한 결단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자신 있었을 테니까. 난 내 자식의 그런 모습이 낯설어. 잘 몰랐거든. 부모는 자식을 가까이 두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보지 못해. 그 점은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너무 두려워하지 마, 아직 젊잖니 “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은 키위이모와의 몇 마디에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휴학은 할 수 없다.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쌓여있는 책을 한번 봤다. 방학기간에 일을 하면서 미래만을 생각하고, 아무 하는 것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생각만 했다.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 짧은 시간 동안 쓰러져서 잠을 자기 바빴다. 일당이 높은 만큼, 나의 체력을 써가면서 써야 하는 일이었다. 계속 서있어야 했고, 밥은 대충 때우기 바빴다. 젊음으로 유지하는 체력은 일하는 동안 쓰고 나면 남지 않았다. 공부를 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통장에는 다음학기 등록금과 용돈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 돈은 순전히 내 등록금이었고, 생활비였다. 내 꿈을 위한 돈이 아니었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돈이었다. 긴 미래가 아닌 짧은 미래. 현재를 위한 돈이었다. 휴학을 하고 나면 공부에만 매진해야 할 것이다. 다음학기를 위한 돈은 필요가 없어지지만, 동시에 시간을 써야 하는 나는 그 시간을 위해 써야 할 돈을 벌 수도 없을 것이다. 돈이 없는 나는 공부를 할 수도 없다. 다른 친구처럼 노량진에 가거나 할 수 없다. 나를 지지하지 않는 엄마에게 부탁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으로 짧게는 일 년, 길게는 3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그게 현실이었다. 어중간한 나에게는 잃을 것이 없는 절박함도 없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중간한 시간. 어중간한 돈. 어중간한 환경에서 막연한 불안감만 가지고 있는 나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