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정리를 잘 못합니다만, 정리합니다.

정리에 둔감한, 쌍둥이 엄마 vs 정리벽이 있는, 그냥 남자

아이가 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보라색 양말 다섯 짝을 나란히 펼치며.

 

"엄마 왜 하나가 없어?"

 

6세 아이의 계산법으로도 분명 '3켤레 = 양말 6짝'이 분명한데... 짝이 안 맞는 한 켤레의 양말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나 보다.


양말은 어디로 갔을까. 매번 세탁바구니에서, 세탁기로,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이어지는

뻔한 동선 속의 양말들. 하지만 우리 집 양말들은 빈번히 자취를 감춘다.

 

서랍 속엔, 짝 잃은 양말들이 여럿이다. 사라진 다른 한 짝을 기다리며, 저마다 수군거린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나오긴 나와!'

 

이렇게 어제 인사했던 물건들이, 오늘은 제자리에 없어서 내일 못 만나는 때가 많다. 숨바꼭질 시작!

 


정리를 잘하면 될 텐데 나는 종종 정리 중에 길을 잃는다.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만큼 진도가 안 나가는 일도 없다. 누군가는 습관처럼 정리를 한다는데, 마음이 홀가분해진다는데... 내게 정리란 늘 미루게 되는 일이다. 정리 앞에 변명한다.


거기에 건망증이 일을 더한다. 내가 지나간 자리엔 늘 흔적이 남고, 다 마신 커피 뒤 끝엔 매번 얼룩이 남는다. 우유와 남은 커피가 한 데 뒤엉켜 굳어져 고체화된 흔적은 꽤나 오래가서 또 다른 설거지 숙제를 남긴다. 바로 씻기지 않고, 불려야 한다. 마시고 난 유리컵을 그 자리에서 물로 씻어 제자리에 두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 간단한 일을 바로 못해서 일을 더 만드는 셈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게으름 앞에, '쌍둥이들'이라는 핑계를 들이대 민다.


어느 날, 화장실 가던 새벽녘

와장창 유리잔을 깼다. 두 아이 틈바구니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살짝 빠져나와 화장실을 들렀다. 그리고 물 한 잔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유리잔을 잠결에 놓친 게다.

 

새벽 3시 반, 사방으로 튄 요리 조각과 함께 단잠마저 달아났다. 눈 비비고 일어난 순간부터 온 집안을 훑으며 뛰어다닐 아이들이 눈에 선했다. 거실 바닥 틈새에 행여 유리조각이 박히지나 않았을까 싶어, 거실과 주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또 훑었다. 테이프로 마지막 작업을 끝내고 나자 동이 텄다.

 

"어젯밤에 뭐가 깨졌어?" 아침 식사를 하던 남편이 물었다.

(...)

재차 질문이 이어진 끝에, 머뭇머뭇 대답이 이어졌다

"유리잔이 하나 깨졌어."

"그 유리잔을 왜 식탁에 두나... 했다.

나는 안방 협탁 위 물컵도 불안하더라."

(언젠가, 한 번은 깨질 컵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예견된 일이라기도 하였다는 듯,

무심한 답변이 이어졌다.

 

"다치진 않았어?"

"그 새벽에, 그래서 유리잔을 다 치웠어?"

 

내 발바닥이 성한 지, 새벽녘의 때아닌 청소로 잃어버린 내 단잠에 대한 안부는 대신 질책의 말이 들려왔다.

 

(유리잔을 식탁에 둘 수도 있지, 그럼 어디에 두나.

자기 전 머리맡에 자리끼도 두는데...)

 

항변의 문장들이 맴돌았지만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일렁거리는 통에 입을 닫았다. 섣불리 억울해했다가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에서처럼 "왜 저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까?" 습관과도 같은 내 부주의함을 탓하는 남편의 문장들이 이어질까 봐.

 

좌석 수와 탁상 수가 맞지 않는다. 아무래도 초조해진다. 탁상 하나에 의자 4개가 한 조일 텐데, 5개인 자리와 3개인 자리가 있다. 왜 저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까? _ 120/444

 

그렇다. 난 이런 수와 열, 규칙에 별 관심이 없다. 어지러움이 불편하지 않다. '저런 데'에 한 번도 마음을 써본 적이 없는 아내와 어느 곳에든 사소한 차이를 감지해 내는 능력이 있는 남편 사이에, 정리로 인한 투닥거림은 끝없이 이어진다.


쌍둥이 육아 중임을 감안하더라도, 정리와 요리 등 살림에 소홀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의 예리한 오감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남편은 거실 바닥에서, 오일이 묻은 아이들 발자국을 읽어냈다. 아이들이 요구르트를 먹는 와중 입 안을 넘어서 치덕치덕 요거트 범위를 넓혀가는 꼴보지 못했다. 나는 이를 촉감놀이라 칭했다. 밟히는 미세한 과자 부스러기들을 그의 발 끝으로 감지했다. 분주하게 요리하던 중, 환기 시스템 가동을 잊은 나 대신 남편의 코는 어김없이 먼저 반응했다. 아이들이 이 책, 저 책을 훑던 과정은 탐색의 시간이 아니었다. 너저분한 독서 환경일 뿐. 취침 전 책 읽기 후 머리맡에 꽂아둔 책들도 정리의 대상이 되었다.


남편은 둔감한 나를 답답해했고 나는 나를 넘어서 아이들에게까지 예민함을 쏟아내는 남편이 숨 막혔다.


매일매일 육아 챕터 중 상당 부분, 우린 '정리'라는 주제로 투닥거렸다.

 

하루의 시작부터 피로하다고 느꼈던 하루의 끝무렵

샤워부스 안 유리창을 물 긁개로 긁고 있던 6세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샤워를 끝마친 아들을 잠시 두고 드라이기를 가지러 간 사이였는데... 그 사이 아들은 샤워부스 안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정리 중이었던 게다.

 

몸 닦기도 바쁜 샤워 후, 부스 안 물방울을 걷어낼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내게 6세 아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 뒤로 유심히 관찰해 보니, 아들은 시시때때로 어지러워진 신발들을 정리하고 목욕용품들을 열 맞춰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의 조금 짧아진 헤어스타일을 발견하고 "엄마, 오늘 예뻐."

한 마디도 잊지 않았다.


엄마가 놓치는 것들을 신경 쓰고 인지하는 아들의 모습에 내 두 눈은 반짝거렸다.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정리 습관과 예리함이라는 단점이 아들에게선 장점으로 날개를 달았다. "오구오구" 감탄사와 함께. 아들의 그것이, 기질이나 성향의 이유인지 아빠의 행동을 어깨너머로 본 학습의 효과인 건지 모를 일이지만. 손 끝이 야무지지 못한 나는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엄마 안 닮아서 다행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와중에도 일렬로 세워

노는, 나와는 다른 아들의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고 있는 내가 서있었다.


요즘의 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정리 습관을 심어주기 위해, 물리적인 정리로 내 마음도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어지러움이 또 다른 건망증을 낳지 않도록, 물건을 찾지 못해 헤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나를 위한 정리를 한다.


까다로운 남편 구미에 맞추기 위한 정리 말고.

자유로운 독서까지 방해하는, 불필요하게 예민한 그런 정리 말고.


그리고 아이들을 넘어서 남편의 귀까지 닿도록 말한다.

"엎지를 수도 있지.

묻히고 먹을 수도 있지.

닦으면 되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정리를 하는 동안 모인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과 불필요한 감정들을 종류별로 묶는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가선 이 세상에 다시없을 텐션으로 '거침없이' 버리고 온다.


쓰지 않지만 내게 너무 아까운 물건들은 누군가의 당근을 위해 '나눔'을 한다. 정리로 홀가분함을 얻고 덕까지 쌓은 듯한 기분으로 홀연히 손바닥을 탈탈 털고 오는 내 표정을 읽는듯한 남자 둘의 시선이 보인다.


그렇다. 홀가분하다. 내 몸과 마음이 홀가분할 만큼만,

꼭 필요한 정리를 하겠다.

이전 16화 각자의 동백꽃을 응원하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