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앞둔 며칠 전, 아이의 학교 같은 반 친구의 엄마와 커피를 한 잔 마시게 되었다. 아직 존댓말을 나누는 걸로 봐선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사이.
(김장은 하셨어요?)
겨울철, 주부들이 흔히 나누는 대화의 첫인사이자 안부만큼 아이스 브레이킹하기 좋은 주제가 또 있을까.
아이 친구 엄마는 김장을 하는 시댁까지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 데다... 중간에 휴게소까지 들르고 뭐 좀 먹고 가고 하면 가는 데만 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라... 결론은, 안 간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내년이면 결혼한 지 10년 즈음되어 가는 내가 코로나가 한참 유행이던 시절 마침 코로나가 걸리고 말았던 해, 딱 한 번만 빼고 모두 김장에 다녀왔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럼, 제사도 가세요?)
(시어머님이 대부분 준비하시고, 저는 전 5종이랑 소고기 전 해서 6가지 전만 준비해 가요.)
(대단하시네요. 전 제사도 안 가요.)
김장도 안 가고 제사도 안 가도... 김장김치는 택배로 받고 제사는 남편만 1박 2일로 다녀온다고 말하던 그 엄마는 연신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나중에... 전 혼자서라도 김장은 할 것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혼자 중얼거리다시피, 나온 내 말에 그녀는 살짝 감탄까지 한 듯했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간 걸로 봐서는. 박수까지 살짝 친 걸로 봐서는.하지만 그 끝엔
(뭐, 그렇게까지...) 줄임말이 숨겨져 있던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독일에서 첫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는 막내 동생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독일에 나와서 김치를 담그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난 나중에 언니가 담근 김장 김치만 얻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중에 우리 둘이 김장김치를 버무리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며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막 쪄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찐 고구마에, 우리가 '싱건지'라고 부르는 아삭하고 시원한 물김치를 먹는 조합을 좋아하는 나로선. 어머님이 담가주신 얇은 나박김치에 베인 깊은 맛에 자주 감탄하는 나로선. 가위로 자르는 김치 대신 결에 따라 쫙쫙 찢어 한 입 가득 먹는 생김치를 먹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어떤 요리에라도 묵은지를 넣으면 묵은지 마법이 이루어진다는 걸 잘 아는 나로선. 친정 엄마의 김치와 시어머님의 김치 사이, 각각 다르지만 둘 다 맛있는 맛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는 복을 가진 나로선. 겨울날의 김장으로 한 해가 여러모로 두루두루 맛있어질 수 있는 행운을 놓칠 리가 있나.그리고 매번 양가에서 김치 찬스를 누리다 보니 사 먹는 김치엔 내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장인의 김치라도 하더라도. 우리 집에 김치 명인이 둘이나 있습니다만! 하는 자신감이 양 어깨에 장착되어 있었달까.
하지만 막상 김장 현장에 도착한 며느리는 네일아트를 지우지 못한 채로, 도마와 칼 앞에 섰다. 새벽 5시 50분.
5시 30분 즈음부터 들리던 시어머님의 칼질 소리에, 알람 없이도 눈이 저절로 떠지던 아침. '더 자고 이따 와도 되는데...' 다음에 이어지는 김장날의 굿모닝 인사는
김장하는 날에, 왜 네일 아트를 하고 왔어
였다.
(죄송해요. 미리 못 지웠어요...)
네일아트를 하게 된 경위와 못 지우고 오게 된 숱한 변명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변명 대신 칼을 잡았다. 더 열심히, 소로 넣을 갓과 미나리, 대파, 쪽파 등을 쫑쫑 썰어볼 요량으로.
평소 때와 다른 없이 재료를 잡은 손가락의 손톱이 보이지 않도록 손을 안으로 오므려 모았다. 하지만 눈치가 없었는지, 긴장한 탓인지, 삐져나온 손톱 끝자락 한쪽이 썰려졌다.
(악!!!!!)
도마 한쪽, 선명하던 민트색 네일 한 조각.
(눈치 없이,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하니!)
젤 네일 한 조각을 서둘러 쓸어 담았다.
진땀이 나면서 손 끝이 흔들렸다. 이런 자세로, 김장을 해보겠다고!
김장날 훨씬 이전부터 어머님과 아버님이 준비해 오신
한 망의 생마늘에서 벗겨지고 썰려진 간 마늘과 영광에 손수 가 사 오신 액젓류들, 순창까지 가서 사 온 고춧가루를 넣어 방앗간에서 갈아온 양념들, 찹쌀에, 멸치 다시마 육수를 넣어 만든 찹쌀풀들이 일제히 한 마디씩 하는 듯했다.
(김장 전부터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네일아트 하나를 못 지우고!우린 순창에서 온 고춧가루! 영광에서 온 액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