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 부부는 어렴풋이 딩크족을 꿈꿨다. 아이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나의 뱃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꺼이 반겨주지 못했다. 나는 지인에게 임신소식을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 이제 끝났어.”
나의 말에 지인이 놀라 말했다.
“야, 아기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 처음으로 뱃속 아이를 의식했다. 그래, 내 이야기를 아이가 다 듣고 있구나. 조심해야겠구나. 이제 그야말로 홑몸이 아니구나.
임신 3개월 차에 초음파 촬영으로 뱃속 아기를 보았다.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분명 아이는 움직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풍차 돌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든 생각은 ‘세상에 이리도 예쁠 수 있을까?’였다. 이런 아이를 두고 어떻게 인생 끝났다는 말을 했을까. 미안한 마음과 감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런 내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잠시나마 반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나는 비장해졌다. 이렇게도 소중한 아이, 기적처럼 나에게 찾아온 아이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화내는 모습이었다. 화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주 욱하던 부모님의 모습은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육아에 비장해진 나는 화내지 않는 엄마가 되기로, 다정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로 가는 테세우스가 만난 괴한들 중 하나다. 그에게는 크기가 다른 침대 두 개가 있었다. 그는 여행객들을 침대에 눕힌 뒤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 침대보다 큰 사람은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늘려 죽였다.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은 자신이 세운 일방적인 기준이나 잣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고집과 편견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혔다. 내가 가진 좋은 엄마 상에서 벗어나면 내 몸을 잘라 버리거나 늘려버렸다. 그러면서 스스로 괴로워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내 몸을 딱 맞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아이도 즐겁고 나도 즐겁다. 5권. 이제 잠잘 시간인데 아이는 또 읽어 달라고 한다. 10권. 다시 잘 시간이라고 좋게 타이른다. 안 듣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참고 읽어준다. 15권. 이제 자자고 한다. 아이가 싫다며 징징거린다. 나는 욱하고 만다. 아이는 울고 나는 후회와 자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매사 이런 패턴이었다. 화내지 않는 엄마에 집착할수록 더욱 화내는 엄마가 되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니 아이에게 적정한 한계선을 그어주지 않았다. 만약 한계선을 정해 놓는다면 아이가 선을 넘을 때 “안 돼”라는 말을 할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징징댈 것이고 그러면 내가 화를 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계선 없이 참는 것은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화를 넘어 분노였다. 그러고 나면 나는 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 벌을 줬다.
아이가 만 36개월부터는 훈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옳고 그른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떤 기준이나 한계선을 부모가 아이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과 한계선을 제시해 주지 않는 엄마 밑에서 아이는 오히려 불안했을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우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 됐을 무렵 속싸개를 헐렁하게 입혀줬을 때 평상시보다 자신의 팔과 다리가 더 많이 뻗어져서 놀라 울던 모습과 비슷하다. 신생아에게 속싸개를 꽁꽁 싸매 주는 것은 뱃속의 환경과 비슷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만약 신생아에게 속싸개를 해 주지 않으면 팔과 다리를 뻗었을 때 뱃속 막이 막아주는 느낌 없이 허공으로 뻗어져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우리 아이에게 한계선을 제시해주지 않은 건 신생아에게 속싸개를 해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아이는 불안해서 더욱 징징댔고 나는 자주 화를 내게 됐던 거였다.
사실 아이에게 제시하는 기준과 한계선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몰랐다. 책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자신과 타인을 위협하는 행동이냐 아니냐이다. 이에 더해 아이의 안전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내가 견디기 어려운 수준에 다다를 때이다.
엄마는 아이가 징징거릴 때 화를 낼 게 아니라 단호해져야 한다. 화는 ‘네가 징징거리니 내 기분이 나쁘다.’라는 감정만 전달될 뿐이다. 단호히 말하면 나의 ‘의지’가 아이에게 전달된다. 즉 단호하다는 건 무섭고 엄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금 읽는 그림책이 마지막이라고 의지를 담아 이야기하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엔 아이는 징징댈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단호히 말했을 때 늘 그 말대로 실천했다면 아이의 징징거림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제는 화내지 않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적정한 한계선을 정하고 단호해지려 노력한다.
내가 만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치워버렸다. 대신 넓고 따뜻한 온돌방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아이와 함께 마음껏 뒹굴며 지낸다. 온돌방에서는 침대처럼 떨어질 염려가 없다.
브런치에 연재한 글이 감사하게도 종이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공감과 위로를, 나아가 치유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