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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Feb 24. 2021

시댁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신혼부터 7년 동안 살던 전셋집의 재개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우리는 운 좋게 신도시 아파트 분양에  당첨 되었는데 완공까지 아직 1년 반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다시 전셋집을 얻을지 시댁으로 들어갈지를 고민했다. 시댁에는 아직 미혼인 아가씨도 함께 살고 있었기에 망설였지만 나의 직장과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시댁에서 더 가까워 새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까지만 들어가 살기로 했다. 시어머님이 쓰시던 화장실이 린 안방이 우리 세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시어머님이 준비해 놓으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내가 일하는 동안 어머님은 청소도 다 해 놓으셨고 빨래도 다 해 놓으셨다. 나는 설거지만 하면 되었다. 시어머님은 늘 물을 끓여 드셨다. 둥글레와 약재를 섞어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 식힌 뒤 유리병에 옮겨 냉장고에 넣어 두셨다. 구수한 물맛이 일품이었다.

 아이와 거실에서 놀 때면 어머님은 식탁에 앉아 성서를 읽고 계셨다. 가끔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안방에는 나만의 공간이 없었다. 불을 끄고 아이가 잠들면 안방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가 잠들면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데 화장실 가려고 나온 아가씨가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스마트폰 불빛이 내 얼굴만 비추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아가씨와 나는 함께 웃었다. 주무시다가 중간에 깨어 화장실에 가시던 어머님은 출근해야 할 텐데 안자냐며 걱정해 주셨다.

 시댁에서 산지 두어 달 정도 지났을까 나는 뭔가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어머님이 차려주시는 밥을 먹는 게 불편해졌다. 언제나 모든 걸 다 해 놓으시는 어머님께 감사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붕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물을 많이 마시는 나 때문에 어머님은 물을 좀 더 자주 끓이셔야 했다. 그 수고를 알기에 물도 마음 편히 마실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 아이와 놀 때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을 의식했는지 아이에게 전처럼 장난스런 표정을 짓거나 잔망 떠는 몸짓을 하기가 어색했다. 나는 점점 아이 앞에서 부자연스러워졌다. 관객을 의식한 연기자 같았다고 할까. 그것은 어느 날 시댁에 아무도 없고 아이와 나 단 둘이 있을 때 아이 앞에서 잔망을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깨달았다.


 밤에 거실에 앉아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볼 때면 아가씨가 화들짝 놀라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머님이 안자냐고 걱정해 주는 일도 반복되었다. 더 이상 거실에서 나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깜짝 깜짝 놀라는 아가씨에게도 미안했고, 안자냐고 걱정해주시는 시어머님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거실을 떠나 아이 옆에 누워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책을 읽었다. 자세도 불편했고, 아이도 불빛 때문에 깊게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자는 게 낫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그럴 경우 간신히 쉬고 있는 나의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 화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기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

 유레카를 외치며 화장실 구석 선반에 스탠드를, 변기 앞에는 목욕탕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도 보고 책도 읽었고 변기통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글을 쓰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는 스탠드 불빛 각도가 잘 안 맞아 자세를 삐딱하게 잡아야했지만 나만의 공간을 이렇게라도 누린다는 것이 좋았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을 마련한 것 같았다. 화장실 창문으로 보이는 달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화장실을 나만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지내던 어느 날 밤 화장실 문이 열렸다. 어머님이었다.

 “세상에! 너 여기서 뭐 하니?”

  어머님은 화장지를 가지러 오셨다가 화들짝 놀라셨다. 거실 화장실의 화장지가 떨어졌는데 여분의 화장지가 바로 안방 화장실에 있었던 것이다. 순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탄로 난 것처럼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내내 찌질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나만의 공간 화장실과 이별했다. 비밀이 탄로 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처럼 화장실의 공간은 더 이상 ‘자기만의 방’이 아니었다. 나의 숨통은 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반면 신랑은 아주 편해 보였다. 자신의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미안해 할 필요 없었고, 집안일을 전혀 손대지 않아도 미안해하지 않았고, 마음껏 구수한 물을 마셨다. 오히려 밤에 어머님께 술상을 받는 지경이었다. 신랑에게 나의 고충을 이야기하며 그냥 잠시라도 집을 구해 살자고 했다. 신랑은 일언반구도 없이 거절했다. 나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신랑에게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간당간당하던 나의 숨통은 끊어졌다. 일상은 죄송스러움과 미안함, 불편함으로 꽉꽉 차버렸다. 점점 웃음을 잃어갔고, 표정을 잃어갔다. 이것 역시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나의 이런 심정은 고스란히 아이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앞에 그렇게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게 아님에도 시댁살이가 힘들었다.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이렇게도 큰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오로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곳에서는 역할에 따른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 엄마가 아닌 아내가 아닌 며느리가 아닌 오직 나로써 존재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잠시 가면을 던지고 온전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나에게 숨통이었다.



브런치에 연재한 글이 감사하게도 종이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공감과 위로를 주고 나아가 치유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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