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공그림책②
권정생의 '훨훨 간다'

- 둘이서 고스톱을 한 판 치던가!!

by 맑은샘

연애할 때는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려도 번개같이 알아듣던 나.

하긴 그땐 남편도 내 눈썹이 살짝만 올라가도 하던 말을 멈추고 눈치를 봤지.

결혼만 하면 서로 배려하고 마음도 잘 헤아릴 줄 알았어.

웬걸

오 년, 십 년, 이십 년 살다 보니

우선 내 귀가 무척 거만해졌어.

웬만한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소리도 듣고 싶은 대로 듣나 봐.


식당에서 남편이랑 해물찜을 먹는데 사장님이 다가와서 물었어.

“과일과 식혜 드릴까요?”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후식을 먼저 준다고?’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남편이 달라고 했어.

“아니 좀 이따가 달라고 해야지. 밥 다 먹고!”

남편은 무슨 소리냐며 사장님이 가져온 걸 가리켰어. 세상에 ‘가위와 집게’였어.

남편 입은 허술해졌어.

틀니를 한 것도 아닌데 발음이 웅얼웅얼.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나는 무식하고 용감하게 외쳤어.

“뭐라고? 뭐라고?”


남편은 변함없이 성실해.

화 한번 안 내고 몇 번이고 대답해.

“$%^#@*”


내 귀엔 여전히 안 들려.

정말 정말 답답해.


나이 들면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침침 하다던데 거기에 하나 더 보태야겠어.

발음도 옹알이하듯 허물어져.


권쟁생의 동화 <훨훨 간다>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장 보러 가는 할아버지에게 무명 한 필을 내주며 이야기 한 자리와 바꿔 오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말이 없었겠지.

그나마 겨우 한마디 하면 할머니는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거야.

이도 없는 호호 할아버지니까 말도 술술 새고.


생각다 못한 할머니는 정성껏 짠 무명 한 필을 투자한 거야.

할아버지는 이야기가 뭐 그리 비싼가 싶었지만 그래도 할머니 성화에 무명 한 필을 메고 나섰어.

장터 한 구석에서 할아버지는 온종일 손님을 기다렸지만 허탕을 쳤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다 정자나무 밑에서 코 빨간 농부를 만났어.

눈치 빠른 농부는 무명 한 필을 받고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팔았어.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가 맘에 들었어.

왜냐고? 아주아주 짧은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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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할머니와 마주 앉았어.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큰일이니까 얼른 이야기를 해야 해.

무명 한 필이나 주고 산 이야기를 까먹기라도 해 봐.

긴긴밤 할머니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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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칠 수 없었어.

왜냐고? 아주아주 비싼 이야기니까.


할머니의 눈이 반짝거렸어. 할아버지가 에헴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어.

“훨훨 온다.”

할머니도 따라 했어.

“훨훨 온다.”

마침 그 집에 도둑이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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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도둑은 두 노인네의 큰 소리에 설마 하며 솥단지 안에 있는 누룽지를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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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 집어 먹는다.”

“콕 집어 먹는다.”

도둑은 기겁을 해서 담을 훌쩍 넘어 달아나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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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 이놈! 훨훨 간다.”

“예끼 이놈! 훨훨 간다.”


귀가 어두운 두 노인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하호호 웃었어.

웃음소리가 도망가는 도둑에게도 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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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호 웃던 할머니는 눈이 휘동그레졌어.

할아버지는 오간데 없고 자기를 좋아하던 힘센 이웃집 총각이 나타난 것 같았어.

하하하하 웃던 할아버지 눈도 휘둥그레졌어.

할머니는 오간데 없고 볼 빨간 우물가 처녀가 나타난 것 같았거든.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마다 하하호호 이야기에 빠져서 행복하게 살았대.


무명 한 필 내어 놓을 만했네.

나도 더 귀가 어둡기 전에 남편 말이 더 술술 새기 전에 밤마다 재밌는 이야기 한 자리씩 할까 봐.

오호, 이건 어때?

더 웃긴 얘기 한 사람에게 오만 원 몰아주기. 너무 비싼가?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어쩌냐고?

그러면 둘이서 고스톱을 한 판 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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