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연 Oct 13. 2020

감각에 관하여

_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

ⓒ서정연


어쩌면 많은 것들이 나의 형편없는 미각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원래 시력이 조금 약하다든지 귀가 어두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남들보다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분명 존재할 텐데 그게 바로 나다. 아마도 성장과정에서 혀의 감각을 발달시킬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맛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아주 기초적인 맛 - 달거나 쓰고 짜고 맵다는 것 -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문제는 각각의 재료들이 한데 버무려지고 복잡한 조리과정을 거쳐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경우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나마 텅 빈 벌판에 기억을 잃고 서 있는 것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된다.


그래서인지 먹는 행위를 딱히 즐긴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 먹는다는 건 굶주린 배를 어떤 식으로든 채운다는 걸 의미한다.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김밥을 우적거리든,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질 좋은 스테이크를 썰고 있든 간에 큰 차이가 없다고나 할까. 어떤 사람들은 키스할 때 상대방의 혀에서조차 온갖 맛을 감지한다던데, 나는 뭘 먹든지 '역시 맛없다'는 생각과 함께 모종의 씁쓸함이 뒤따를 뿐이었다.


맛을 섬세하게 구분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삶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간혹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그 식당 어땠어? 맛이 괜찮았어?"라고 물을 때면 살짝 난감하긴 했지만.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내가 지금껏 겪어온 세상과의 미묘한 불화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음식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은 그간 막연히 짐작해왔던 것보다 나에게 훨씬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게 아닐까 싶은 거다. 둔감하기 짝이 없는 혀로 인해 그때마다 대충 만족시켜온 나의 입맛, 그와 더불어 긴 시간 동안 나만의 방식으로 쌓이고 형성되었을 어떤 기호(嗜好)가, 남들이 세워놓은 가치 체계와 그다지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서로 어긋나 있는 경우도 잦았다고 하면 너무 비약인 걸까.


굳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외모를 가꾸거나 번듯한 커리어를 쌓고 싶지도 않고 자산을 모으는 데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의도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욕을 비롯한 여타의 욕망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내가 봐도 뭔가 비정상적이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에 얼룩이 묻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우리 엄마의 말에 따르면, "쟤는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 모르는" 현실 감각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덜 떨어진 인간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꿈꾸고 욕망하면서 살고 있느냐고?


'나'라는 인간에게 결핍돼 있는 부분, 그러니까 괄호로 비어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마치 또 다른 감각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 신경은 줄곧 다른 데에 쏠려 있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혀가 아닌 다른 감각으로 감지해야 하는 것들. 미각의 도움 없이도 내가 깊이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조금은 낯선 영역들. 잠. 맨발. 이사. 교통수단. 간이역. 흑백텔레비전. 빛과 어둠. 붉은 압생트. 죽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 풍경에 마음을 기댄다는 것. 언어의 실로 꿰매는 마음의 조각들. 타인의 고통.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얘기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