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권과 채권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돈은 만기가 되면 갚거나 상환기한을 연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체이자를 물게 되면서 신용등급도 강등 당한다. 심지어 담보물까지 경매에 넘겨지게 된다.
한 친구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적지 않은 돈을 빌려갔다. 여러 달이 지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이 친구가 새로 고급차를 샀다. 빌려간 돈은 갚지 않은 채. 몇 십만원이면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겠으나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이라면 어떨까? 여러 번 독촉을 해도 갚지 않는다면, 강제로 돌려받기 위해 끝내 법적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채권, 채무의 뜻은 각각 '받을 돈'과 '갚아야 할 돈'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이들 단어의 뜻은 엄청나게 다르다. 채권의 법률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권과 대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다.
'물권'은 나의 이익을 위하여 특정한 물건을 배타적으로 사용, 수익 또는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물권에는 소유권, 점유권, 지상권, 지역권, 저당권, 유치권, 질권 등 민법 상 물권이 있으며, 분묘기지권, 법정 지상권 등 관습법 상 물권이 있다. 이들 권리는 공통적으로 내 권리에 침해가 있을 때 해당 물건을 보호 또는 처분함으로써 내 손해를 방지하는 특징이 있다.
소유권이 내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 수익, 처분하는 권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지상권, 지역권, 전세권 등은 남의 물건이더라도 내 권리에 따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저당권이나 만기가 지난 전세권은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법원에 경매를 통한 강제집행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한편 '채권'은 내가 상대방에게 일정한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다른 말로 '청구권'이라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채권·채무관계를 반복적으로 생성한다. 예를 들어 내가 대금을 미리 내고 음식을 주문했다. 이 때 나는 음식점 주인에게 음식을 요구할 채권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음식점 주인은 내게 음식을 제공할 채무를 가진다. 집을 매수할 때도 나는 매도자에게 잔금을 지불할 채무를 지며, 동시에 집을 인도받을 채권을 갖는다. 매도자는 그 반대이다. 이처럼 채권과 채무는 반드시 금전 거래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자. 드디어 금전 거래로 돌아왔다. 내가 A에게 빌려주었던 돈을 돌려받는 날이다. 나는 그 돈에 관한 채권이 생겼고 A는 내게 돈을 갚아야 할 채무가 생겼다. 서로 약속을 잘 지켜 변제하면 그 돈에 대한 채권과 채무는 동시에 소멸한다.
그런데 채무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법적 조력을 받아(공권력을 통해) 돈을 회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단순 채권자는 소송 절차를 통해 판결을 받은 후 지급명령 또는 강제경매를 통해 돈을 받게 된다. 이 경우 채권자들이 많아 서로 경합할 경우 내가 제대로 돈을 회수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일이 흔하다).
그런데 내가 담보물건을 잡아 저당권을 설정한 물권자라면 소송 절차 없이 바로 경매를 신청하며(임의경매), 배당 때 후순위에 있는 물권자나 단순채권자에 우선하여 채권을 회수할 수 있다. 이러한 우선변제권은 물권자로서 저당권자, 전세권자, (담보)가등기권자 등이 가진다. 예외적으로 주택 임차인과 일부 상가 임차인에게도 우선변제권을 인정하는데, 부동산의 입주(인수)와 주민(사업자)등록과 확정일자 부여로써 생긴다.
앞서 말했듯이, 단순 채권(금전이건 비금전이건)은 상대방이 불이행할 경우 소송 절차를 거치면서 채권이 훼손되거나 회수비용이 적지 않게 소요되기도 한다.
서두에서 거론했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은행에 대출금을 성실히 상환하는 까닭은 돈일 빌릴 때 설정한 '물권' 때문에 내 재산이 날라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돈을 빌려간 친구가 내 돈을 제때 제대로 값지 않는 까닭은 내가 돈 받을 권리가 단순한 '채권'이므로 법적 청구권을 얻기 위해서는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야 하며. 심지어 그래서 포기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이라도 큰 금액의 거래(금전 또는 비금전)를 할 때에는 미리 물권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