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비행기에 전남친과 짝사랑이 타고 있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고 싶었다

by Enero


“미친, 나 지금 전 남친이랑 같이 제주도 가고 있어!”


평일 낮 비행기였다. 사람도 몇 없었다. 비수기였고, 평일이니 그다지 사람이 많을 시간이 아니었다.

비행기에 탑승해 선반에 짐을 올리고 대각선 앞쪽에 잠시 눈이 머물렀을 때, 나는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헤어진 지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미운 예전 남자 친구.


그 자식은 내가 좋다며 한참 따라다녀 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본인 왼팔에 커다란 문신을 새기고 집 앞에 찾아왔다.

낯선 여자 얼굴을 새긴 문신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 3년간 만났던 전 여자 친구란다. 아무래도 그 여자 친구를 못 잊겠고, 그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자긴 그 여자를 다시 만나야겠단다. 이런 미친놈은 살면서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얼굴을 한 여자와 딸과 함께 제주 여행을 가려나보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악연이다. 하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에!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가 한 시간에 못 해도 다섯 대는 있을 텐데, 어쩌다 하필이면 이 비행기에 같이 타게 된 건지.


어이가 없어서 친구들 단톡방에 “미친, 이 비행기에 내 전 남자 친구 타고 있어. 나 지금 구남친이랑 제주도 가는 중!”이라 남겼다.

친구들은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냐며 웃었고, 제주도에 착륙해서 휴대전화를 켜자 단톡방에는 “ㅋㅋㅋ”로 가득한 메시지가 200여 개 쌓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저 꼴 보기 싫은 작자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쪽을 봐야 했다. 흘깃거리며 눈치를 보는데, 광채가 나는 남자가 그 뒤에 서 있었다.


학부 시절 짝사랑했던 동아리 선배다.




연락을 따로 주고받지 않은 지 꽤 되기도 했고, 설렘에 손이 떨려 전화번호를 못 찾겠다. 당신이 맞느냐고 당장 따라가 등짝을 때려보고 싶었는데, ‘혹시 그 선배가 아니라면 어쩌지?’ 하는 마음과 ‘여자 친구와 같이 왔다면 내가 방해하는 걸지도 몰라.’하는 생각에 문자를 보냈다.


[뭐예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다. 아마 난데없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카톡에 그도 적잖이 당황한 모양인지 곧바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어요?”

“혹시 어디세요?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저 제주도거든요.”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어떻게 이렇게 운명적으로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에!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가 한 시간에 못 해도 다섯 대는 있을 텐데, 우리는 어쩌다 운명적으로 이 비행기에 같이 타게 된 건지.





학부 시절 그는 여학우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했다.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따뜻한 목소리와 젠틀한 행동까지.

짧고 검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 날카로운 듯한 눈매에 짙은 눈동자, 기대보고 싶게 만드는 넓은 어깨. 100m 밖에서 봐도 그를 알아볼 수 있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보다는 <명탐정 코난>의 핫토리 헤이지에 가까웠다. 송중기보다는 데니스 오 같은 남자.


공강 시간에 그 선배를 캠퍼스에서 보는 날이면 친구들과 나는 잘생긴 전학생을 본 여고생처럼 “오늘 그 선배 봤지? 린넨 셔츠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라며 까르르 웃었다.

그 선배와 과가 달라 수업이 겹치는 일도 없다. 수강 신청을 할 때마다 우리는 ‘이번 교양 수업에서 제발 그 선배랑 같은 수업 듣게 해 주세요!’하고 빌었다.


나는 그 선배가 활동하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나무 1이 되든 그림자 3이 되든, 어떤 배역이든 상관없다는 열의를 보이고 장기자랑으로 소녀시대 <Gee> 를 췄다. 나는 지독한 음치였지만 잠재된 흥만큼은 알아봐 준 덕에 연극부 오디션에 합격했다.

친구들은 그 선배와 빨리 친해져서 같이 술자리 한 번만 만들어 달라고, 랜덤 게임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난리였다. 팬클럽 회장인 내가 대표로 호랑이를 잡으러 갔으니, 팬클럽 토끼들에게 얼른 내 사냥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선배는 무슨… 사이버 가수 아담도 저렇게 로봇 같았을까 싶을 정도로 사무적이었다. 친절하고 나이스 했지만, 그냥 같은 동아리 선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게 커다란 벽이 있었다. 완벽.

용기를 내 밥 사달라고 하면 온 후배를 다 끌고 학식에 데려가고, 커피 마시고 싶다고 하면 테이크아웃 커피를 쥐여 주고, 술 한잔하자고 하면 그날은 연극부 회식이 된다.

가까워지고 싶어서 몇 달 마음 앓이를 했지만 끝내 둘이 이야기 나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절대 그 벽을 넘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할 즈음 다른 친구에게 고백을 받았고 나도 그렇게 첫 연애를 시작했다.


축제 때 연극부 공연에서 조폭1을 맡은 선배를 보며 ‘저런 역할을 해도 멋있네.’ 생각하고 나는 연극부 활동과 짝사랑을 그만두었다.





그랬던 어린 시절 짝사랑을 이렇게 운명적으로 비행기에서 만났다.

이미 전남친 따위는 무사히 착륙했는지 스카이다이빙으로 뛰어내렸는지 내 알 바 아니다.


저 호랑이를 또 만났다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필연으로 만들어 붙잡고 싶다. 저 범은 내가 그 때문에 몇 달을 앓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냥 의연한 척, 이 모든 덫은 우연이 아니라 내가 쳐 놓은 척할 것이다.

제주도 어디에서 어떻게 여행할 건지 묻자 술술 나온다. 그에 맞춰 내 머릿속도 팽팽 돌아 여행 계획이 바뀐다.


잠깐 공항에서 인사만 나눴을 뿐이고, 각자 재미있는 여행 하라고 말했는데 나는 어떻게든 우연을 가장해 이 멋진 드라마 세트장 같은 섬에서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을 일부러 그가 머물 거라 말한 곳 근처 해변에서 조깅하고 커피를 마셨다. 우리가 처음으로 단둘이서 이야기 나눌 기회를 기도 갖고 싶어 한다면, 마음이 맞아 이 카페에 올지도 몰라.


그리고 등 뒤에서 심장을 멎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네요?”


거센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고 내 마음에도 큰 파도가 요동쳤다.


나란히 앉아 테라스에서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냥 어떻게 살았고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제주에 올 때 그 비행기에 전 남자 친구가 타고 있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재미있던 추억은 무엇이 있었는지와 같은, 그냥 친구와도 할 법한 말이 오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왔다. 학교에 선배의 팬클럽이 있었으며, 그 팬클럽 회장이 나였다고 고백했다. 왜 그 팬들을 소개해주지 않았냐고 하기에 “누구 좋으려고요?” 했다.


사실 연극부에서 나를 처음 봤을 때, 본인 이상형을 만났다고 생각했대서 또 가슴이 막 뛰었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냐고 하자 CC 하다 데인 적이 있어서 절대 안 할 거라 다짐했단다.


“둘 다 학교 떠났으니 이제 CC는 아니네요?”

내가 농담조로 던졌고 그도 크게 웃었다.


그때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실내로 자리를 옮기던 차에 그가 가방에서 우산 하나를 꺼내더니 머리 위로 펼쳤다. 우리는 파도 소리와 빗방울 소리 한가운데 계속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외국의 한 섬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비가 귀찮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카페 마감 시간이라고 쫓겨나기 전까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잠깐이라도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화장실에도 안 갔다.


겨우 자리를 떠서 각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데 아이들이 해변에서 작은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우연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재회한 걸 축하해주는 필연처럼 느껴져서 말했다.

“제가 준비한 특별 이벤트예요. 연극부 20학번들한테 시켰어요!”

그가 큰 소리로 웃어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손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서 계속 고민했는데, 고민만 하다 결국 헤어졌다.


또 한 번의 우연을 만들 수 있을까?

무언가 빌미가 될 만한 게 또 없을지 고민하며 제주에서의 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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