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를 따라 버스에서 그냥 내려버렸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서

by Enero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 시간 돼?”


수아가 뜬금없이 연락이 와서는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 시간 되느냐고 물었다.

“약속 있지. 너랑.”

우린 이렇게 아무 소리나 해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사이다.


“아 정말? 어떡해! 나 너랑 둘이 만나는 거 아니고, 우리 동아리 선배 둘도 초대했어. 네가 아주 좋아할 만한 사람.”


미쳤다! 그렇게 염원하던 또 한 번의 날이 찾아왔다.

선배 중 한 명이 결혼을 하게 되어 청첩장 모임을 하는데, 거기에 내가 학부시절 짝사랑했던 선배가 온다는 게 아닌가!


“수아야, 사랑해. 난 너 없으면 못 살지. 왜 다음 주 월요일이야? 난 당장 오늘도 괜찮은데!”

설렌 내 목소리를 눈치챈 수아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예쁘게 입고 오라며,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예쁜 거로 세 개만 보내라고 했다. 절친한 여자 친구들 셋이 있는 대화방은 인터넷 쇼핑몰을 방불케 하는 나의 패션쇼 사진으로 가득 찼다.

“꼬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1번 입고, 그냥 대충 만나도 되는 모임이면 3번 입자.”

결단력 넘치는 혜린의 한마디에 다른 옷은 다 정리해 넣어버리고 1번 사진으로 보낸 녹색 원피스를 입었다.


일요일 밤부터 설레서 잠이 안 왔다.

그 선배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약속 시각보다 일찍 나가서 기다려야지. 5분이라도 더 볼 수 있게.


결국, 약속 시각이 7시인데 나는 5시에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해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날 만나기로 한 모임 대화방에서 그 선배도 일찍 도착할 것 같다는 말에 압구정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고 있자고 말했다.

변함없이 멋진 모습에 또 마음이 간지러워서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웃으며 선배 팔을 툭 쳤다.




그날 그 모임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고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모든 관심과 집중은 그 선배 하나에 몰려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반짝이는 눈과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는 여전하다.

20대 초반, 소녀 같은 마음으로 바라봤던 그 눈이, 얼마 전 제주도에서 부딪힌 파도 소리가, 얼굴을 때려도 귀찮지 않던 빗방울이 그대로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밥을 다 먹고 모두 즐거웠다고 인사하고 집에 가야 했다. 그런데 또 너무나도 운 좋게 나와 그 선배, 우리 둘은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가득한 버스에 서서 가는 길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고 지루한 구석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치여 자꾸 팔꿈치가 부딪힐 때마다 내 온몸이 찌릿 울렸다.


에드워드 홀의 <근접 공간학>에서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인 거리’로 분류한다.

친구 사이에서 46cm~120cm의 개인적 거리가 적당하다면, 연인 사이에서는 45cm 안쪽도 ‘친밀한 거리’로 내어줄 수 있다.

나는 그 남자를 120cm 이상의 거리에서 바라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10cm도 안 되는 친밀하다 못해 ‘위험한 거리’ 안에 두고 있었다.

제발 버스가 모든 신호에 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버스에 올라타서 이 간격이 더 좁아지길 바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그 선배가 예고도 없이 벨을 눌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써 내리세요?” 하니, 이번 정류장이 바로 본인 집 앞이라 했다. 우리 집까지는 아직 30분은 더 가야 하고 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와 시간에 행복해 죽겠는데, 하차하신다고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자 선배는 쏙 내려버렸다.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맨 정신의 나라면 하지 못했을 말을 뱉어 버렸다.

“저, 혹시 따라 내려도 돼요?”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기사님, 잠시만요!” 하고 냅다 버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선배도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보인 눈치였다. 지난번 우리가 우연히 마주친 날부터 오늘 있었던 일까지 너무 재밌지 않았느냐며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는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직 조금 취기가 남아있어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 버렸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꼭 쥐여준 바람에, 그 손의 온기 때문에 내 귀가 먹고 숨이 멎었다.


태연한 척 조잘조잘 말은 했지만 온 정신이 이 호랑이에게 다 홀려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렸다. 소주를 두 병씩은 마신 것 같은데 그 술이 다 깨버릴 정도로 많은 말을 했고,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 언제 집에 올 거냐는 엄마 목소리에 “지금 들어가.”하고는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택시를 잡으려 큰 길가에 서 있었다.

술은 이미 다 깼는데, 그 선배의 눈빛과 향기와 목소리에 흠뻑 취해 돌발행동을 하고 말았다.

버스를 따라 내렸을 때처럼, 그냥 선배 목 뒤를 끌어안아 버렸다. 그도 내 허리를 꼭 안아주었다. 숨결이 목 뒤와 어깨에 닿는데 정말 확 키스해버릴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택시가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온 바람에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못내 아쉬워 집에 가는 길에 문자를 남겼다.


오늘 너무 즐겁고 설렜어요.
저 사실 오늘 되게 뽀뽀하고 싶었어요.
부끄러우니까 얼른 자요! 잘 자요.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자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하길래 내가 바보인지 이 사람이 바보인지 생각하다 단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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