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데이트를 사랑하는 이유
선배는 그날 결국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각에 약간 늦었다. 그래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고 있던 게임 퀘스트를 여러 개 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흰 카라티를 입은 선배 모습이 보였다.
‘흰색 카라티는 멋진 남자들이 꼭 갖는 아이템인가?’하고 돌아보니 카페에 있는 남자 셋 중 하나는 하얀 카라티를 입고 있다. 그러니까 멋진 남자들이 흰색 카라티를 입는다기보다는 저 멋있는 사람이 흰색 카라티를 입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니요, 저도 방금 막 도착했어요. 저희 식사하러 가요!”
나는 어디에 가서 무얼 먹을 건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몇 차례 우리 도대체 어디 가는지 정해놓고 가는 거냐고 해서 그렇다고 하고는 그 선배가 좋아한다던 해장국 집 앞에 갔다.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그 집은 선배만 좋아하는 해장국 집이 아니라 온 서울 시민이 좋아하는, 나만 모르는 맛집이었나 보다. 줄이 길게 늘어선 걸 보니 점심 식사를 점심시간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에게 전시회 티켓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그 전시회 티켓이 꼭 내가 원하는 날짜에 -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을 때 - 맞춰진다는 건 더더욱 드문 일일 것이다.
"저, 전시회 티켓 생겼어요. 오후에 별일 없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철저한 계획이었다.
유명한 작가의 미술품 전시였다. 공원이나 영화관, 카페 같은 뻔한 장소보다 내가 박물관이나 미술관 데이트를 이 남자와 꼭 하고 싶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0년 전쯤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시크릿가든>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선 보는 커플은 우리밖에 없을 듯한데."
"시간 낭비를 안 해도 되거든요. 걸음걸이 보면 성품 나오고, 그림 보는 안목 보면 교양 수준 보이고, 미술관에 어울릴 사람인지 클럽에 어울릴 사람인지, 향수 취향이 노골적인지 우회적인지 답이 빠르니까."
- 드라마 <시크릿가든> 중
사실 이렇게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함께 걷다 보면 손과 팔이 스치는 순간들이 영화관에서처럼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생긴다. 잠시 멈춰 서서 한 곳을 함께 바라볼 수도 있고, 한 작품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그림마다, 작품마다 우리의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나란히 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찬찬히 뜯어보며 “펜던트 모양이 불사조네. 이런 모양의 브로치는 어때요?”라던지, 나오미 캠벨의 사진을 보며 “와, 나오미 캠벨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어요?” 같은 소소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본 적이 있는 작품이 나오면 괜히 아는 척을 해 보기도 하고, 자연히 외국에서 봤던 작품이나 여행 이야기로 이어져 내가 듣고 싶은 그 낮고 따뜻한 목소리를 라디오라도 켜 놓은 듯 들을 수 있다.
조용히 관람만 해야 하는 영화관이나, 환호성을 끊임없이 외쳐야 하는 콘서트와는 다른 나지막하고 평화로운 이야기가 오가기 좋아서. 나는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 박물관에 가고 싶었다.
짝사랑 선배와 내 동기까지 동기 생일 기념으로 셋이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그 약속이 잡힌 열흘 전부터 손꼽아 그날만 기다렸다. 예전에 스치는 말로 그 선배가 “빨간색 옷이 되게 잘 어울린다.”라고 했는데 그 말 때문에 인터넷을 다 뒤져서 예쁜 빨간색 스커트를 찾아 주문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나가서 선배와 동기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려 했다. 같이 만날 동기 생일을 핑계로 선배가 아쉬워할까 봐 선배 것도 샀노라고 말해야지.
“미안해, 나 일이 생겨서 못 만날 것 같아.”
만나기로 하기 전날,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 동기가 빠지면 ‘생일 축하’라는 이 약속의 의미가 없어지는데… 선배가 약속을 아예 취소하고 미루자고 하면 어쩌지? 어차피 열흘 전부터 그 날짜의 일정을 빼둔 거라면 별다른 약속이 그새 잡히진 않았을 텐데, 둘이 보자고 할 일은 없으려나?
“선영이가 급한 일이 생겨서 안 될 것 같다는데… 들으셨어요?”
“그러게. 무슨 일 생겼나? 내일 약속은 어쩌지?”
“혹시 다른 일정 있으세요?”
“아니, 둘이서라도 만나서 밥 먹을까?”
내 마음을 읽은 게 분명하다. 나는 그 길로 잽싸게 전시회를 검색해서 표를 예매한 뒤 맛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점심만 먹고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노파심도 들었지만, 나는 혼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는 것도 좋아하니까. 아쉬워도 그냥 전시를 완전히 즐기면 그것대로 좋겠지, 하면서 결제창을 띄웠다.
“아, 나 근데 오늘 술을 좀 마셔서 내일 늦잠 잘 수도 있어.”
“네, 괜찮아요! 푹 자고 내일 일어나면 만나요!”
나는 내일 이 사람을 만날 생각에 설레서 손이 떨릴 정도인데, 이 사람은 나 만나기 전날 팩을 해도 모자랄 판에 술을 마시고 있다니… 조금 흥이 깨질 뻔했지만, 아무렴, 뭐 어때. 내일 점심 메뉴는 해장국으로 해야지!
선배 인스타그램을 쭉 보면서 음식 사진을 눌러봤다. 그 밑에 달린 코멘트를 보면서 어떤 식당과 음식을 좋아하는지 파악했고, 올해가 가기 전에 또 가고 싶다던 식당을 찾아내서 그 집에서 해장을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도에서 이리저리 동선을 파악해서 오후에 박물관에 자연스레 다다를 수 있도록 머리를 썼다.
선배는 그날 결국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각에 약간 늦었다. 그래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고 있던 게임 퀘스트를 여러 개 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흰 카라티를 입은 선배 모습이 보였다.
‘흰색 카라티는 멋진 남자들이 꼭 갖는 아이템인가?’하고 돌아보니 카페에 있는 남자 셋 중 하나는 하얀 카라티를 입고 있다. 그러니까 멋진 남자들이 흰색 카라티를 입는다기보다는 저 멋있는 사람이 흰색 카라티를 입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니요, 저도 방금 막 도착했어요. 저희 식사하러 가요!”
나는 어디에 가서 무얼 먹을 건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몇 차례 우리 도대체 어디 가는지 정해놓고 가는 거냐고 해서 그렇다고 하고는 그 선배가 좋아한다던 해장국 집 앞에 갔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그 집은 선배만 좋아하는 해장국 집이 아니라 온 서울 시민이 좋아하는, 나만 모르는 맛집이었나 보다. 줄이 길게 늘어선 걸 보니 점심 식사를 점심시간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여기 가려던 거였어? 여기 사람 항상 엄청 많아. 여기 말고 근처에 또 맛있는 곳 있어. 그리로 가자."
그를 꾀기 위한 내 데이트 계획의 첫 번째 단추는 내 뜻대로 채워지지 않았지만, 선배가 데려가 준 곳이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다.
밥을 먹고 나서 또 미리 알아봐 둔 카페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고, 이번에도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한적하고 사람 없는, 아기자기 예쁜 카페였다. 티라미수가 유명한 곳이라 그걸 하나 시켜서 떠먹으며 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조심스레 오후에 일정이 또 있는지 물었더니 다행히 없다고 했다.
“그럼 일어날까요? 제가 준비한 게 있어서요.”
작은 작품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람객에게 몸이 밀리자 선배는 내 허리께에 잠깐 손을 올려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 순간 이후 도슨트의 친절한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또 그에게 온 정신이 팔렸다.
이쯤 되면 팔짱을 슬쩍 껴봐도 될 것 같아서 용기 내 손으로 팔꿈치 어귀를 잡았고, 피하거나 싫은 내색이 없어 그대로 꼭 붙잡고 걸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은 당신이고, 가장 멋진 이야기는 우리가 걷고 있는 이 트레일이라고 속으로 외쳤다. 전시가 엄청나게 길어서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내 ‘출구’ 사인이 보여서 우리는 그 길로 박물관에서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도 너무 무겁고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붙잡아 둘 만한 쓸데없는 이야기가 없을까 하던 차에 선배가 저녁 약속이 없으면 함께 하자고 해서 또 냉큼 좋다고 따라갔다.
식당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떤 유명인이 범죄를 저질러 수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저, 사실 수배 중이에요.”
난데없는 나의 고백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다.
“절도죄로 수배 중이에요. 제가 선배님 마음을 훔쳤거든요.”
“검거되셨네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내 마음에 쇠고랑을 채워서 내 볼이 발그레해지고 광대뼈가 눈썹 끝에 닿을 만큼 한껏 올라갔다.
집 앞에서 잘 가라며 또 쿨하게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 저게 호랑이일까 여우일까 생각하던 찰나, 그가 다시 돌아보더니 내 입을 맞추고 갔다.
이 작자는 여우가 분명하다. 꼬리는 내가 흔들었는데 이상하게 내 꼬리가 저기 가서 붙었다. 정확히 아홉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