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친구가있는 그녀와 만나고 싶어
20년 만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들과 동창회가 열렸다.
거창하게 말해서 ‘열렸다’지, 사실은 준영이가 아는 그 시절 같은 반 친구의 친구를 한 데 불러 맥주를 마시기로 한 날이었다. 다녔던 학교 근처 작은 호프집을 빌렸고 스무 명 남짓 되는 꽤 많은 친구가 모였다. 발 넓은 준영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실 모임 약속을 잡은 날부터 조금 설렜다.
최지원. 내 첫사랑. 5학년 2반, 맨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던 내 짝꿍. 그 친구가 과연 나올지, 나온다면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했다.
흰 우유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단발머리 여학생. 5학년 나는 토요일마다 나오는 특별 우유 급식에 초코 우유가 나오면 먹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가 종례 마치고 가방 싸는 시간에 지원이에게 쓱 내밀었다. 평일에는 선생님 몰래 ‘제티’ 초코 가루를 넣어 책상 아래로 흔들어 건네면 그 아이는 활짝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준영아, 너 진짜 최고야!”
그러면 나는 슈퍼 히어로가 된 것처럼 뿌듯했지만 쑥스러운 마음에 “야, 너 그러다 키 안 커.” 나지막이 말하고 칠판만 쳐다보곤 했다.
중학교 때 내가 전학을 가면서 준영이를 비롯한 몇몇 사내놈들 말고는 연락이 점점 끊겨 지원이 소식을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약속 시각이 저녁 7시였는데 하필 5시 30분에 회의가 잡혔다. 6시가 퇴근 시간인데! 금요일 오후 5시 30분에 회의가 있다는 건 오늘 퇴근하지 말라는 소리다. 회의실에서 랩을 뱉듯 보고를 마치고 업무를 마무리하고 보니 저녁 8시가 넘었다.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 문을 연 순간, 얼큰하게 취한 채 일어나 건배사를 외치는 준영이, 그리고 그 너머로 최지원이 있었다.
“와, 지원아! 너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응, 그럼. 잘 지냈지. 너 하나도 안 변했다.”
“너는 좀 변했다. 더 예뻐졌네.”
30대가 된 나는 이제 여자에게 이런 말도 뻔뻔하게 할 줄 안다.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지원이는 내가 좋아했던 그 단발머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고 쌍꺼풀 없는 긴 눈이 웃을 때마다 하얀 도화지에 반달을 띄워 열두 살 김성훈 마음이 되살아났다.
왁자지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창회가 끝나고 나는 지원이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서로 번호를 찍어주자고 스마트폰을 내밀었는데 이런, 아쉽게도 그녀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에는 너무나 다정해 보이는 남자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감추고 웃어 보이며 “남자 친구야? 잘 어울린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며칠 후, 아쉬움과 그리움이 뒤섞여 준영이에게 슬쩍 지원이 근황을 물었다.
“야, 그렇지! 너 지원이 엄청나게 좋아했잖아. 걔 남자 친구 있긴 한데, 요즘 사이 별로라던데? 몇 번 헤어졌었다나. 한 번 연락해봐!”
마침 지원이 회사가 우리 회사와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회사 점심시간에 근처 식당에서 밥 한 끼 하자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지원이는 예전부터 “그래.”라는 대답보다는 “좋아.”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나는 이게 내가 제시한 게 좋다는 건지, 나랑 함께 하는 게 좋다는 건지 헷갈려서 그냥 내 멋대로 해석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몇 번 점심을 함께하거나 커피를 마시다 보니 금방 옛날 그때처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이제는 가끔 평일 저녁 식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말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그녀의 주말, 그 황금 같은 시간도 나와 함께 할 수 있길 바라게 되면서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원아, 네가 내 첫사랑인 건 알지?”
“초코 우유 주던 게 생생하다! 그때 김성훈 멋있었지, 귀엽고!”
반달이 초승달이 되도록 웃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그때만큼 너 지금 좋아해. 당장 남자 친구 있는 것도 알아. 헤어지고 나한테 와 달라, 뭐 그런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아니 사실 뭐 그래 주면 좋지만. 아무튼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너 나 남자 친구 있는 거 알잖아!”
애써 웃어넘기려던 그녀에게 나도 맞받아쳤다.
“야! 좋아하는 것도 안 되냐? 그리고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웃겨! 그럼 골 한 번 먹혔다고 골키퍼 바꾸냐? 아무튼 네 마음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조금 시간을 줘.”
얼마 후, 그녀는 만나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연락해왔다. 나는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초코 우유 하나를 손에 쥔 채 10분 거리를 전력 질주해서 그녀의 회사 앞에 찾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한 그 어떤 생각도 죄책감도 전혀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놈이 모자라서 나한테 뺏긴 거 아니겠어? 하고 넘겨버릴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이렇게 뺏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인데. 다른 남자들도 골키퍼 상관없다며 달려들면 어쩌지? 한 골쯤 먹였다고 골키퍼를 바꾸지는 않는다지만, 감독이 바꾸라면 골이 안 들어가도 바뀔 수 있잖아?’
이런 상상이 뇌리를 스치고 난 뒤부터는 나는 내 마음과 다르게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에 가는지, 도대체 무얼 하길래 두 시간이나 연락이 되지 않는 건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여자 친구들을 만난다고 해도 그 친구들이 다른 남자들과 같이 놀자고 하지는 않을지, 헬스장에 갔다가 땀 흘리는 늑대들이 침까지 흘리는 건 아닌지.
지원이는 지금 집에 친척이 와서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고 있으니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했지만, 이 컴컴하고 비겁한 활자들이 내 머릿속을 내내 떠돌아서 결국 영상 통화까지 걸어버렸다. 화면에는 정말로 친척 어르신들이 집에 계셨고, 그다음 비춘 얼굴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한 지원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은 죄인지, 아니면 내가 한번 뻔뻔한 공격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남았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공이 필드에 올라가기도 전에 나는 골키퍼 자리에서 잘리고 다시 FA 시장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