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와 잤다

이성친구와 둘이 1박 2일 여행가는 애인 VS 전 애인과 술 마시는 애인

by Enero

입방아에 올랐다 하면 열전이 펼쳐지는 주제가 있다.

이성 친구와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동물과 달리 이성적 사고 판단이 가능하다. 이성애자 (혹은 헤테로, 스트레이트)에 이성과의 우정은 우정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 동성 간의 친구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한 사람이 마음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걸 숨기고 있으면서 술을 많이 마시면 그 속내가 확 커져서 드러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이걸 ‘술 마시고 한 실수’라고 한다.

코웃음을 쳤다. 어째서 술 마시고 하는 실수는 이성 친구에게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성애자 입장에서) 동성 친구에게 우리는 실수로 키스를 하거나 엉덩이를 만지지는 않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이 사람을 친구로만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술에 홀딱 취해도 내 정신만 차리고, 내가 선만 잘 지키면 평생 볼 내 소중한 친구와 그런 얼굴 붉힐 실수 따위는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난 이걸 실수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너와 잔 건 온전히 내 의지이고, 우리가 마음이 닿았기 때문에 한 일이다.

실수라고 하면 이 행위가 너무 가벼워질 것이다.




키가 크고 잘생겨서 길 가던 사람들도 뒤를 돌아보고, 절친한 친구인 나와 함께 있는데도 다른 여자들이 다가와서 연락처를 묻곤 했다.

본인 피셜 소위 ‘리즈 시절’은 그가 28살 때로, 번듯한 직장에 훤칠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그는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 콧대가 하늘을 치솟아서 단짝이 보는 나로선 “네가 뭐라고 그렇게 교만하냐”며 비웃었다.

객관적으로도 멋진 놈이기는 했지만, 이성으로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식이 나에게 말했다.


“야, 난 너랑 친구여서 너무 좋아. 나는 너만큼 친한 여자인 친구도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하지 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내가 왜 본인을 좋아하고 고백할 거로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너도 꿈 깨."




여기서 밸런스 게임을 한번 해 보자.


"이성 친구와 단둘이 1박 2일 여행을 가는 애인 vs 전 애인과 술 마시는 애인"


이성 간에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이성 친구와 단둘이 1박 2일 여행을 가느니 차라리 저녁 늦은 시간까지 전 여자 친구와 술 마시는 남자 친구가 낫다.

아니다, 역사는 낮에도 이뤄질 수 있다. 전 애인과 술집이 아닌 호텔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면? 그러니 차라리 방을 따로 쓴다는 가정이 있다면 친구끼리 단둘이 가도 되지 않을까?

내가 머릿속에 떠 있는 몇 명 안 되는 남자 사람 친구와 둘이 여행 간다 해도 별일 없을 것 같긴 한데..


어려운 논제는 일단 각설하고, 이 20년 지기 친구가 내 자취방 침대에 같이 눕기 전까지는 내 상상 속 그는 "절대" 나와 관계를 갖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한 침대에 누워도, 발가벗고 누워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다 큰 성인 남녀가, 그것도 술의 힘을 빌린다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야, 침대에 선 그어줘."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감히 나한테 선을 그어? 너 따위가?

나는 선을 넘다 못해 지웠다.




생각보다 우리는 쿨한 건지, 쿨한 척하는 건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다시는 그날 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 말을 꺼내고 복잡 미묘한 감정을 나누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는 20년 지기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약속한 듯 그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날 갔던 포장마차에서 파는 LA갈비가 끝내준다는 이야기 말고는.


한편으로는 내가 잘.. 못했나?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내가 아는 이놈은 나와 뭘 해 보려거나 관계를 발전 시켜 볼 생각이 없단 걸 잘 알고 있다. 나도 구태여 지금의 편한 관계를 망치기 싫다.




연애하던 시절, 꼭 한 명쯤은 있는 남자 친구의 '쎄한 여사친'은 결국 이런 빅데이터로부터 나온다. 다른 여사친은 다 되는데, 그 여자만큼은 너무 쎄하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있다. 구웅의 절친한 여사친이라면서 진짜 여자 친구인 유미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내가 너보다 구웅을 잘 알지."란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서새이.

누구에게나 서새이가 있다.


그는 절대 그 '서새이'와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하지만, 지난날 내가 모은 데이터에 따르면 그녀와는 사귀었거나, 고백했다 차였거나 혹은... 앞으로 사귈 사이다.


나도 결국 그의 '서새이'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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