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받아주지않는다고 화내지 마세요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중고 거래를 하느라 지하철역에서 만났던 남자가 내 휴대전화 번호로 끈질기게 연락하며 구애를 해온 일도 있었고, 함께 일하던 다른 회사 직원이 내 마음을 넘겨짚고 뜬금없는 고백을 해온 적도 있다.
내가 쉬워 보이나? 아니면 내가 무언가를 흘리고 다니나? 자책감마저 들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웃지를 말아야겠다.’,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서로의 마음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을 때 고백을 ‘확인차’ 했으면 좋겠다. 일방적인 통보, 그리고 거절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죄짓지 않은 죄인이 된 것 같아 싫다.
이 남자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게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근처에 있던 그 남자가 합석하면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한 열흘쯤 된 것 같다. 그 남자는 친구를 통해 내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렇게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어제 뵈었던 지현이 친구 김종혁입니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솔직히 아무 감상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나에게 인상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좀 더 날카롭게 표현하자면 그냥 그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옷 입는 스타일부터 피부 톤, 어조까지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 자리에 있는 내내 별로 말도 건네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으므로 술자리가 끝나고 헤어질 때도 그냥 가볍게 묵례만 나누고 떠났다.
그랬던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내일 저녁 식사 같이하실래요?]
지현이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내 전화번호를 주었다는 점이 조금 불편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 남자가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는 걸 아니까. 지현이를 생각해서라도 거절하기 조금 어려웠다.
[아, 내일은 선약이 있어서요. 수요일 저녁은 괜찮을 것 같아요.]
[네, 그럼 수요일 저녁 먹어요!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특별히 가리는 게 없어서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럼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수요일 저녁 7시에 신사역에서 뵈어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밥을 먹는다는 건 고역에 가깝다.
평소 나는 조잘조잘 말이 많은 편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꺼낼 기운이 안 난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에 맞장구만 쳐 줬다. 리액션이라도 잘해야겠다 싶어 재미없는 농담에도 활짝 웃어주고, 말을 한 귀로 흘리다가 그 문장이 끝날 무렵만 살짝 듣고 “와, 정말 멋진 일을 하셨네요.” 정도만 했다.
이 식사를 얻어먹었다간 “오늘은 제가 살게요. 다음에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던지, 식사 후에 커피나 술을 사라고 할 것 같았다. 저녁 식사만 빨리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 싶어서 그냥 내가 계산해야지 싶었다. 얻어먹고 잠수를 탔다간 예전 그놈들처럼 ‘비싼 밥 얻어먹고 사라진 나쁜 여자’로 뒷말이 나올 게 뻔해서. 그래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 카드로 결제해 버렸다.
그런데 이것도 실수였다. 내가 밥값을 냈다는 사실에 그가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다. 이건 내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마치 내가 그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해서 계산을 한 거라고 오해한 듯하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 왜 계산하셨어요. 저희 2차 가요. 제가 정말 맛있는 곳으로 모실게요.”
결국 이자카야에서 사케 한 병을 비우고서야 나는 그 불편한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자꾸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성화를 부렸지만, 어차피 술도 한잔하셨고 대리운전 기사님께 말씀드리기엔 우리 집이 정반대 방향이니 택시를 불러 가겠다고 단단히 일렀다.
마음에 드는 남자였고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면 나도 헤어지는 시간이 아쉬워 데려다준다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겠지만, 이 남자가 내 집 주소까지 아는 건 끔찍하다. 굳이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가셨어요?]
일부러 읽지 않은 상태로 두었더니 30분쯤 지났을까, 또 한 번 메시지가 왔다.
[수진씨, 저는 수진 씨가 마음에 들어요. 지난 주말에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했고요, 오늘 같이 식사하면서도 정말 즐거웠어요.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저는 수진 씨와 앞으로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어요. 저희 계속 만나 보실래요?]
저런.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펼쳐졌다. 일단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니 메시지를 확인만 한 채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답을 하지 않고 자버렸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나의 ‘무응답’을 그의 고백에 대한 답변이라고 여길 리 만무하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 메시지를 보냈다.
[종혁 씨, 저도 어제 즐거웠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고 연애할 여유가 없어서요. 다른 좋은 분 만나 뵙길 바랄게요.]
연애할 여유는 차고 넘치지만, 고백을 거절하기에 이만한 사유가 없다. 하지만 그는 그 후로도 끈질기게 나에게 구애를 해 왔다.
[그럼 제가 기다리면 어떨까요?]
[그래도 저희 잘 맞는 것 같지 않았나요?]
[이번 주 토요일에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어때요?]
[수진 씨, 점심 드셨어요?]
대답 없는 카톡 창에서 혼자 열심히 떠들어댔다. 결국 나는 지현에게 이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수진 씨, 정말 너무하시네요. 예의가 없으신데요?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마세요. 저는 진심으로 수진 씨가 마음에 들어서 노력했는데 어떻게 제게 기회도 주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 한 번을 안 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요. 부디 똑같은 남자 만나서 똑같은 상처 받으시길 바랄게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다 났다. 두 번 안 만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중고 거래를 하느라 지하철역에서 만났던 남자가 내 휴대전화 번호로 끈질기게 연락하며 구애를 해온 일도 있었고, 함께 일하던 다른 회사 직원이 내 마음을 넘겨짚고 뜬금없는 고백을 해온 적도 있다.
내가 쉬워 보이나? 아니면 내가 무언가를 흘리고 다니나? 자책감마저 들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웃지를 말아야겠다.’,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서로의 마음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을 때 고백을 ‘확인차’ 했으면 좋겠다.
일방적인 통보, 그리고 거절에 대해 화내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죄짓지 않은 죄인이 된 것 같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