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애원하는 너를 무시한 채 나는 내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어 근데 왜일까, 이렇게 고요한 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때의 너와 내가 생각나는 건. 생각을 멈추고 싶어도 렉걸린 컴퓨터처럼 닫기 창이 안 눌러지는 건. 차라리 콘센트를 뽑아 버리고 싶은데 콘센트는 보이지도 않아. 그렇게 나는 몇 번이고 그 시절 그 자리에 끌려가 앉혀지는 거지.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못 할 말이 없었지. 참 관념적이지만 통상적인 문장이야. 그래.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으니까. 그 시절 서로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채 정의하지도 못 한 상태로 서로를 부둥켜 안기 바빴지. 어떤 마음이든 서로에게 더 퍼붓지 못 해서 그저 아쉽고 괴로울 뿐이었지. 그때 너는 내게 말했어. 어느 날 내게 가시가 돋친대도 결국 너는 나를 힘껏 끌어안을 거라고. 내 가시가 네 몸을 관통한대도 너는 나를 더 끌어당겨 힘껏 안을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말이야. 근데 그런 소나기 같은 너를, 나는 참 많이도 사랑했어. 하루종일 소나기를 맞아 감기에 걸린대도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다짐했지. 때로는 그 다짐이 행복할 만큼 벅차서 네게 꺼내 보이기도 했지. 그땐 선인장이 소나기와 평생을 함께 살 수 있겠다 장담하곤 했어.
근데 결국 소나기는 그치더라. 늘 그랬듯이.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맑게 갠 하늘에 여름이 오듯이. 그렇게 소나기는 멀리멀리로 사라져 버리더라. 그리고 물을 너무 많이 머금은 선인장은 못내 시들어 죽어 버리더라.
소나기를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너를 보내 버렸지. 서로를 끌어안던 그 시절처럼, 우린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 하고 등을 돌리기 바빴지. 나는 소나기를 맞던 그 시간들을 지워 버려야 했거든. 그래서 너무 바빴거든.
이제서야 이렇게 안부를 전하네. 나는 불안정한 여름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어. 가끔은 비가 오는 여름이지만, 그건 소나기가 아니야. 왜냐면 소나기는 지나간 지 오래됐거든. 나는 이제 우산을 꼭 챙겨 다니게 됐거든.
너는 나를 끌어안고, 내 가시들이 네 몸을 휘저어도 된다고 했지. 결국 너는 뜨거운 피를 내뱉으며 내게 사랑의 맹세로 그 끝을 장식하고 싶다고 했지.
근데 그럴 거면 그때 죽지 그랬어. 왜 이제 와서 또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거야? 이제 내게 너는 안주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왜 혼자만 모든 아픔을 떠안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억울하기라도 한 거야? 왜 아직도 울고 있는 거야? 너는 왜 내가 너에게서 떠나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나는 가시덤불이 돼야 하는 거야? 왜 나는 철조망이 되어 네 아픔으로 남아야 하는 거야? 왜 그런 거야?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애초부터 소나기였던 건 너야. 그러면서 선인장이었던 나를 곡해하지 마. 나는 이제 선인장도 아냐. 이 불안정한 여름을 이루는 그 무엇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러니까 지난 장마철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마. 네가 날 끌어안았다고 생각하지 마. 너는 나를 그렇게 헌신적으로 끌어안은 적 없어. 이제 너는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런 의미 없는 너를 온전히 받아들여. 장마는 지난 지 오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