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창문을 여니 새소리가 먼저 반긴다. 맑은 바람이 훅 몰려오며 금세 내 몸을 씻긴다. 공기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는 쾌청한 봄 날씨다.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 근거리의 나무들이 달콤한 그린 향을 날리며 살랑거린다.
나는 하루에도 자주 이 창가에 앉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방 쪽으로 넓은 통창이 나 있어서 바깥 뷰가 시원하게 들어온다. 덕분에 나는 이 창을 통해 나무들의 사계절을 집안에서 감상하곤 한다.
키 큰 나무의 허리쯤과 내 눈높이가 맞닿는다. 나무들의 발아래와, 우듬지를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으로 내 집은 아파트 7층이다. 떡갈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들의 여린 새싹들이 봄을 피워내기에 한창인 시기다. 지난해 둥지를 틀었던 나뭇가지 끝 동그란 새집 한 개가 아직 그대로인 채 걸려있다. 이 산을 주거로 삼는 이름 모를 새들이 또 올 한 해를 살기 위해 어느 나뭇가지 틈에 벌써 새로운 집을 짓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시야를 살짝 낮추면 하얀 벚꽃 몇몇 그루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하늘하늘 흔들리며 서있다. 햇살을 물고 하얗게 반짝이는 벚꽃들이 예쁘다. 이효석은 메밀꽃을 소금에 비유했는데 우리 집 창문 넘어 둥그런 야산, 나무둥치들 사이사이에 펼쳐진 벚꽃들이 마치 그곳에만 소금을 뿌린 듯하다.
나의 정원. 나뭇가지 끝에 새둥지가 보인다.
벚꽃이 만개하기 전엔 야산 끝자락에 봄을 먼저 알리는 홍매화 나무 한 그루가 홀로 피어 고고한 자태로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아직 바람이 차던 그 무렵, 나는 창문을 열 때마다 핑크빛 홍매화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귀한 예술품을 감상하듯 넋을 빼고 그 꽃을 바라보곤 했다. 바람이 꽃잎을 사르락 흔들 때도, 빗방울이 사사삭 꽃잎을 적시는 날도 홍매화와 주고받는 눈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무들의 잎사귀가 점점 자라고 벚꽃 망울이 열릴 즈음, 홍매화꽃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직 덜 진 꽃들이 반쯤 매달려 있지만 여전히 곱다.
나의 이 ‘소박한 정원’은 사계절 다른 빛깔로 나를 위로한다. 봄에는 이렇듯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으로, 여름엔 물오른 청년 같은 푸른 열정으로, 가을은 서서히 무르익는 고즈넉한 단풍 빛깔로, 겨울은 침묵의 고요로, 혹은 하얀 눈의 적요로서 나와 함께 한다.
나의 정원은 또한 매번 다른 향기를 선사한다. 오늘은 레몬향처럼 상큼한 향기로 가득하다. 기분 좋은 비릿함을 줄 때도 있고, 샤프란 꽃 향 같은 정갈함이 후각에 닿기도 한다. 방금 끓여낸 원두커피 향처럼 약간은 씁쓸하고 고소한 향기가 곁들여질 때도 있다. 비 내리는 오후의 냄새, 흙냄새는 더욱 빼놓을 수 없다.
자연에서 커피 향이 느껴지는 계절은 특히 가을이다. 바바리코트를 꺼내 입기 시작할 무렵, 아침에 창문을 열면 매일 달라지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계절의 변화는 곧 나의 변화임을 상기하게 된다. 점점 노령으로 다가가는 변화 말이다.
가을은 시간의 흐름을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가을 빛깔은 세월에 실려 나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인다. 사람이라는 나의 실체(또는 허상)를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가을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창문 밖 나의 정원은 모든 계절에 나와 함께 동행한다. 기쁨일 땐 기쁨을 배가해 주고 슬픔일 땐 다독여준다. 내 감정의 빛깔이 어떠하든 나무들을 지긋이 보고 있으면 고요하고 차분해진다. 그런 시간을 나는 즐긴다. 이 봄, 예쁘고 소중한 이 풍경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뭇잎 빛깔이 좀 더 짙어지면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내 정원의 하얀 벚꽃들도 꽃잎을 조금씩 떨굴 것이다. 홍매화가 그랬듯이 말이다.
뒤이어 아카시아꽃이 만개하겠지. 그리고 한여름엔 매미소리와 함께 청록의 이파리들이 내 눈을 부시게 할 터이다. 이처럼 나는 내게 주어진 작은 정원과 함께 세월의 리듬에 따라 흐르고 있다. 자연은 나와 가장 잘 교감하는 사랑스러운 친구다. 때로 나의 거울이고 스승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