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별곡 Apr 26. 2023

3대째 덕후

-덕질은 집안 내력-

1994년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가 전국을 휩쓸었다. 조각같이 잘생긴, 숯검댕이 눈썹의 살짝 느끼한 남자 주인공이 트럼펫을 불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떠오른다.


여주도 (내 기준에선) 못생기고 내용도 재미가 없었는데 엄마는 방송시간을 기억해 꼬박꼬박 빠짐없이 봤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며칠이 지난날이었다. 심부름 때문에 안방 장롱을 열었는데 오른쪽 문 안에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는 남자 주인공의 사진 3장이 붙여져 있었다.

‘도대체 이런 사진은 어디서 난거지? 엄마는 이제 아빠 대신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가?’

어린이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눈부신 금발 머리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여리여리한? 하늘하늘한 꽃미남, 방금 순정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외모와 미성의 목소리였다. “오 줄리엣~.” 하며 그녀에게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던 로미오,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로미오가 되자마자 전 세계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레오는 그 후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지만 당시에 나는 파란색 눈망울에 사로잡혔다.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베이비페이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는 날 미치게 만들었다. 그가 나온 영화는 조연, 주연 가릴 것 없이 다 봤으며 그가 나온 잡지, 포스터, 편지지, 스티커까지 모조리 사서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일집에 하나하나 소중히 다 끼워서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때 레오는 나에게 하나의 종교, 교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열정은 레오가 모델들과 끊임없이 스캔들이 터져서 식어버렸다. 내가 애인도 아닌데 미숙한 소녀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잠시 휴식기를 가지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국민 그룹 GOD, 그중에서 꽃미소를 짓는 손호영에 빠지게 된다. 눈웃음이 매력적인 역시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에게 또다시 사로잡혀 처음으로 팬카페에 가입하고 당시 유행하던 멤버가 주인공인 팬픽을 밤새도록 읽었다. 팬픽은 팬들이 쓴 야설(야한 소설)로서 19금을 벗어나 29금 수준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 연예인과 사귀는 건 안 됐기에 멤버들끼리 연인이 되는 동성애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컴퓨터로 눈이 빨개지도록 밤새 팬픽을 읽고 아침에 학교를 갔다. 교실에서는 지오디의 테이프를 워크맨에 넣어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틈만 나면 들었다. 공부한다고 가지 못했던 콘서트는 20살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한다는 100일 콘서트를 구매해 혼자 갔다. 다들 팬클럽에 가입해 단체로 옷을 맞춰 입고 응원봉을 흔들었는데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티비에서만 봤던 호영이의 하얀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황홀했고 남자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덕후질은 계속됐다.


콘서트에 다녀온 지 이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집 앞으로 주문하지 않은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에는 우리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엥 이게 뭐지? 돈이 어디서 났대?’ 뜯어보고 싶은 욕구를 참고 아이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녀석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드디어 왔다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뭔데?” 

“여자 아이돌 앨범~ 포스터랑 스티커도 들어있다.” 

“뭐? 그게 얼만데? 네가 돈이 어디서 나서?” 

“3만 원~용돈 안 쓰고 모았지!” 

“뭐? 이걸 3만 원이나 줬다고?”


기가 찼다. 나는 그래도 중학교 때 덕후질을 시작한 것 같은데 이제 12살 밖에 안 된 어린이가 걸그룹 앨범을 샀다는 사실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노래 제목부터 시작해 앨범 재킷, 포스터까지 꽤나 선정적인 컨셉이었다. 아들은 순간 눈치를 보더니 자기 돈으로 샀다고 간섭하지 말라며 가슴이 드러나 있는 여자 아이돌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였다.

결국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요즘은 사춘기가 빠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머리로는 이해하려 했지만 마음이 그러지 못했다. 꽤나 꼰대 같은 진부한 말들을 아이에게 퍼부었다.


“네가 몇 살인데 벌써 이런 걸 돈 주고 사는데? 엄마 일하러 가고 없을 때 배고프니 간식 사 먹으라고 용돈 줬는데 이걸 왜 사는데? 우리 집에 시디 플레이어도 없어서 틀 수도 없는데 3만 원이나 주고 샀다고 제정신이야? 그리고 귀여운 컨셉의 아이돌도 많은데 무슨 이런 애들을 좋아하는데?” 

“엄마도 BTS 좋다고 맨날 뮤직 비디오 보고 노래 듣잖아! 나는 그러면 안 돼? 나는 얘네가 좋아!!” 

“엄마는 비싸게 돈 주고 앨범을 사거나 포스터를 방에 붙이지는 않았거든.”


유치했다.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아이와 친구처럼 싸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졌고 아이는 (내 기준에서) 선정적인 포스터를 방에 붙였다. 앨범은 뜯지도 않고 신줏단지 모시듯이 숨겨 놨다. 이번에도 남편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반응이었다. 나만 열불이 터졌다.  지금도 주말에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노래를 불러재낀다. 내 취향도 아닌 그 노래와 가사를 듣고 있으면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다. 

주말에 집이 더 고역이다.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왜 화가 나는 걸까. 친정 엄마는 지금은 임영웅을 좋아해서 서울이고 부산이고 콘서트마다 따라다닌다. 엄마의 그런 모습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똑같은 내용의 콘서트를 암표까지 사가며 가야 할 일인가? 그녀와 우리 아이의 마음 둘다를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계산적인 사람, 돈만 생각하는 속물이 됐나 보다. 중학생이 돼서 녀석이 서울에서 하는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줘야 하는 건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분명한 건 이 덕후질은 말릴 수 없는 집안 내력인 듯하다.


이전 10화 학원비 벌려고 학원을 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