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라서 일본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비행기표는 이미 매진이었다. 고민을 하다 5년 만에 여수를 다시 찾았다. 물놀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아이와 신랑을 위해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검색했다. 평소에는 가장 싼 숙박시설만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대형 인피니티풀이 있는 리조트를 예약했다. 1박만 해도 가격이 후덜덜 한 곳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돈 버는데 뭐.' 쿨하게 2박을 결제했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여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이는 비가 오든 말든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엄마, 수영복 어디 있어? 빨리 꺼내줘. 나 물에 바로 들어갈 거야!"
"숨 좀 돌리자. 비 오는데 괜찮겠나? 춥지 않을까?"
"괜찮아~~~ 우리 먼저 들어갈 테니 엄마도 빨리 와."
아이와 남편은 후다닥 수영복을 입고 방에서 사라졌다. 나는 살이 쪄서 작아진 래시가드에 몸을 꼬깃꼬깃 구겨 넣었다. 올록볼록한 옆구리살에 터질듯한 엉덩이가 신경 쓰였다. '수영도 못하는데 이걸 왜 입고 있지? 그냥 물에 들어가지 말고 사진만 찍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숙박비가 비싸니 구두쇠 남편이 한마디 할 듯했다. 튀어나온 배를 한껏 숨을 들이마셔 납작하게 한 다음 수영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궃은데도 연휴라 그런지 인피니티풀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이 제일 많았고 비키니를 입고 인스타용 사진을 찍는 젊은 아가씨들, 커플들도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두 부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에게 미친 듯이 물을 튀기는 두 사람을 보며 창피함과 행복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마라~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잔소리에 묵묵부답인 두 남자. 그러더니 잠수를 해서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시합을 하기 시작한다. '와.. 저 물 진짜 더러울 텐데.. 비염 더 심해지는 거 아냐? 눈병이나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하늘에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또 아이의 걱정을 했다. 여행에 와서도 즐기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썬베드에 앉아서 신랑과 아이의 사진만 찍고 있으니 아이가 엄마도 들어오라고 성화이다. 신랑은 부인이 물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4~5년 전 일이었다. 워터파크에 대형 파도풀이 있었는데 신랑이 깊은 곳에 가야 재미있다며 나를 끌고 들어갔다. 발이 물에 안 닿으면 죽는 줄 아는 나는 소리 지르며 저항했지만 자신만 믿으라는 남편의 호언장담에 결국 졌다.
경적소리가 울리고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리를 덮칠 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남편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물 위로 올라왔고 새로 사서 처음 쓴 신랑의 야구모자는 사라졌다.
"내가 그래서 들어가기 싫다고 했쟤? 왜 억지로 끌고 들어가서 모자까지 잃어버리는데? 저거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어떡할 건데? 가서 찾아온나!"
"혼자 들어가면 무슨 재미인데? 그리고 구명조끼 입어서 저절로 뜨는데 사람 머리는 왜 누르는데? 니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그렇게 우리는 워터파크 한 복판에서 시선 따위는 상관없이 싸움을 했고 망친 기분으로 얼마 놀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 엄마 왈, 4살 무렵 외갓집에 가는 길에 아이가 사라졌는데 의식을 잃은 내가 시냇물에 동동 떠내려왔단다. 아마도 그때부터 물공포증이 생긴 듯하다. 신랑은 이제 포기했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는 아이는 나를 물에 끌고 들어간다.
수영도 안 하고 반신욕 하듯이 앉아만 있으니 같이 놀고 싶었나 보다. 학원에서 배운 실력을 접영부터 자유형까지 한껏 뽐내더니 갑자기 나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아냐~엄마는 됐다. 물 무섭다. 그냥 너나 실컷 해라. 멋있게 동영상 찍어 줄게."
"엄마 하나도 안 무섭다. 내가 잘 가르쳐 줄게. 나만 믿어라." 5년 전 워터파크 일이 떠오른다. 여행 오자마자 싸우는 거 아냐? 하지만 나는 또 졌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자, 엄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몸에 힘을 풀고 얼굴을 물에 담갔다 푸우하며 옆으로 돌려라."
"엄마 손 잡고 있어야 된다. 절대로 놓으면 안 된다."
"알았으니까 어서 다리를 들어봐 봐." 긴장해서 힘이 잔뜩 들어간 몸은 좀처럼 뜨지 않는다.
"엄마 힘을 빼라. 그래야 물에 뜬다." "못하겠다. 다리가 안 들어진다."
십 분간 내 다리를 들기 위해 노력하던 녀석은 결국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는다. 꼴통 엄마라고. 그리고는 휙 자리를 뜬다.
그 말에 발끈한 나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물에 떠서 공포증을 극복하고 싶었다. 나를 포기하고 둘이서 신이 난 부자지간을 보며 챙겨 온 스노클링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몸에 힘을 빼자. 겁먹지 말자. 쫄지말자.' 장비를 착용하니 숨을 못 쉰다는 두려움과 더러운 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온다는 걱정이 사라졌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경직된 몸이 풀어졌고 서서히 다리가 들렸다.
40년 만에 어떤 것도 붙잡지 않은 채 물에 뜨니 짜릿함과 해방감이 느껴졌다. 다리로 물장구를 치고 팔로 물을 가르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게 뭐라고 나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겁을 먹었던 걸까? 물공포증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지만 엄마를 물에 뜨게 해 준, 막말을 한 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