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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Oct 18. 2023

슬픈 발라드 리스트

가을 아침

가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코끝이 시리고 얼음장 같은 발에 수면 양말을 신어야 하는 계절이다. 괜스레 마음도 멜랑꼴리 해져서 일부러 슬픈 영화를 보며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오래된 한국영화이긴 하지만 '클래식'은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지극히 신파스러운 내용임에도 주인공 조승우와 손예진이 다시 만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나는 어김없이 눈물을 쏟는다. 영화가 질리면 가을에 생각나는 음악들을 하루종일 찾아 듣는다. 가장 많이 듣는 베스트 3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 그리고 아이유의 가을 아침이다. 어떤 이는 향기로 지난 과거를 떠올리고 또 다른 이는 물건으로 추억을 떠올린다지만 나는 주로 음악을 들으며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낸다.


특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시적인 가사와 함께 이소라 님의 눈물을 머금은 듯한 음색까지 어우러져 사람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가사를 잘 못 외워서 노래방에 가면 꼭 화면을 쳐다봐야 하는데 이 노래는 처음 듣자마자 암기가 되었다. 한 편의 시와 같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


작사가가 누구인지 찾아보니 이소라 님 본인이다. 그녀의 슬픔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 번은 방송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다 힘겨운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서 노래를 중단한 적도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전 남자 친구(현 남편)와 잠시 헤어졌을 때 이 노래를 계속 틀어 놓고 밥도 먹지 않은 채 일주일을 울었다.


사랑의 끝은 대부분 이별로 예정되어 있는데 왜 알면서도 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이가 든 지금도 모르겠다. 당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이 꼴 보기 싫다며 아예 두 분이서 여행을 떠나버리셨다. 그때는 위로 대신 욕을 하는 부모님이 야속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니 아들이 밥도 먹지 않은 채 울고 있으면 똑같이 집을 나갈 것 같다.


두 번째 최애곡은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이다. 이것 역시 실연의 아픔과 연결된 곡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비교적 일찍 2차 성징이 시작된 나는 6학년이 시작되자마자 같은 반 남자아이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쌍꺼풀이 있는 소처럼 생긴 커다란 눈이 영 별로였는데 반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치는 남자아이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음악시간에 반주를 하는 모습에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무엇이든지 다 잘하는 아이라 반에서 인기가 많았고 수줍음 많으며 소심했던 나는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작고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며 역시나 못하는 것이 없었던 6학년의 최고 인기녀를 그 녀석도 좋아했다.


학교에 가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욱신거렸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주위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며 편지로 고백을 했다. 어차피 졸업을 하니 차여도 안 보면 그만이었다. 역시나 그 애는 당황하며 거절했고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시간은 흘러 사십이 되었지만 이 노래들을 들으면 여전히 그때의 감정과 장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직 사랑을 해보지 못한 아들은 엄마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시간에 계속 부딪힌다. 이 두 곡을 포함해 아이유의 가을아침, 브라운 아이즈 소울, 김동률, 폴 킴까지 듣고 싶은 곡들이 수두룩한데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발 꺼달라고 뒷좌석에서 시비를 건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며 기분이 축축 처지는 게 최악이란다. 아들과 음악적 취향이 비슷한 남편도 동조를 한다. 잠이 와서 운전을 못하겠으니 댄스로 바꾸라고 아우성이다. 결국 수적 우세에 밀린 나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등의 걸그룹 댄스곡을 틀어놓고 괴로워한다. 댄스는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듣지 않는 곡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가사와 빠른 리듬에 마음이 가지도 않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고막이 뎅뎅 울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가방에서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고 버즈를 귀에 꽂는다. 다시 최애 발라드 리스트를 듣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브라운 아이즈 소울의 벌써 일 년을 플레이한다. 이별곡이다. 슬픈 가사와 애잔한 음색에 마음이 시려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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