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비가 내린 뒤라 제법 쌀쌀했다. 반팔만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려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계속 들고 다니던 겉옷을 펼쳤다. 잘 감싸고 와서 다행히 겉에 비가 조금 묻었을 뿐, 내피는 젖지 않았다. 태수는 겉옷을 걸치고 집으로 향했다. 소나기가 휩쓸고 간 길거리는 더없이 깨끗했다. 바람이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낙엽은 보이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널 부러져있던 쓰레기들은 물에 떠밀려 어느 담벼락 밑에 정리라도 한 듯이 놓여있었다. 그가 문뜩 깨끗이 닦여있는 길 위에 하찮은 자신이 놓여있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과의 대화가 그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갑작스레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집에 도착하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쳐다봤다. 물에 빠진 생쥐가 한 마리 있었다. 자신의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칠게 옷을 벗어던지고는 몰을 타월로 닦기 시작했다. 온몸을 닦고 또 닦았다. 닦으면 닦을수록 지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래도 계속 닦았다. 결국, 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자 그는 타월을 아무 데나 던져버리곤 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갑자기 찬기운이 그를 감 쌓다. 그는 수건을 들어 몸을 닦고, 전라의 상태에서 거실의 소파에 몸을 맡기고는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곱씹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 그의 머릿속은 같은 말이 반복 재생됐다. 그는 말을 되뇌며,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는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그가 머리를 들어 밖을 보자 이미 어둠이 내렸다. 곧 가족들이 들어올 시간이라 아무 데나 널 부러져있는 옷을 찾아 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가족이 하릴없이 집에만 있는 그를 비난하거나,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잘 되기를 바랐고, 힘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조차도 그에게는 위선이었고, 자신을 모자란 사람 취급하는 저급한 동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족의 '동정 어린 눈빛'을 견디기 싫어 최근 몇 년간 가족을 가급적 피했다. 그래서 오늘도 태수는 가족이 들어오기 전에 방으로 향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찾아 인사하거나, 그의 방문을 두드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살았고, 그런 삶에 익숙했고,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기에 각자의 행복을 깨지 않기 위한 암묵적인 규칙을 따랐다. 태수는 밖에서 들리는 가족들의 말소리를 방에서 혼자 들었다. 자신이 저 무대에 없다고 해서 섭섭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오랜 시간 방 안에서 책을 읽으며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는지 일찍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전날 이른 시간에 잠이 든 그는 평소보다 일찍이 눈을 떴다. 평소와 같으면 해가 자신의 방을 비추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일어났지만, 오늘은 이른 새벽의 시퍼런 하늘이 방을 비췄다. 그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자세를 바꿔가며 억지로 라도 잠을 청하려 했지만, 뒤척이며 자세를 바꿀 때마다 이불이 펄럭거리며 먼지들이 튀어나와 재채기를 했다. 그는 침대 위에 창문을 열었다. 튀어 오른 먼지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나가고,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방 안에 퍼졌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열린 창을 내려 보았다. 이른 새벽인데도 출근을 위해 사람들이 바삐 걷고 있었다. 그의 방문 밖에서도 출근준비가 한창인 가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가족이 모두 출근하고 나서야 일어나는 그였기에 방문 사이로 들리는 이질적인 소음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잔상이 되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는 가만히 앉아 가족들의 소리를 하나하나 들었다. '헤어드라이기 소리', '식사 중 젓가락이 맞부 딫치는 소리', '겉옷에서 나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 소리는 다채로웠다. 이윽고 도어록이 닫히며 내는 '띠리링'이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가족이 모두 나갔음을 알고는 거실로 향했다. 방금까지의 가족들의 온기가 서려있는 거실은 꽤 따듯했다. 매일같이 10시 넘어 방을 나섰던 태수에게는 낯선 온기였다. 태수가 식탁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침상이 보였다. 그가 배를 곯지 않도록 정성스레 차려준 어머님의 밥상이다. 태수는 당장 허기지지 않았기에 몸을 돌려 소파에 어제처럼 몸을 축 늘어뜨리고는 머리를 최대한 젖힌 채로 앉았다.
곧 그의 시선에 하얀 천장에 꽃혔다. 대리석 거실 바닥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하얀 천장은 반짝이기까지 하며 그를 사로잡았다. 태수는 문득 하얀 천장과 어제 만난 청년이 겹쳐 보였다. 왜 하얀 천장을 보고 청년을 떠올렸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저 청년을 생각하면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아직 풋내기 주제에 청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는 방 안으로 달려가 겉옷을 챙기고는 신발은 꺽어신은 채로 급하게 나섰다. 청년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이 번뜩 들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