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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n 01. 2023

오늘도, 나는 걷고 쓴다

습관처럼 해야 한다

  

밤. 그것도 저녁 9시 반이 다된 시각. 밖으로 나간다. 운동화를 신고. 이제 거의 중독 수준이다. 매일 운동하는 게. 이것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틀 운동하고 하루 쉬는 게 근육 생성에 더 효율적이란다. 그것과 상관없이 하루라도 어느 정도 걷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낮에 시간이 안 돼 걷지 못한 날은 밤에라도 걷는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그렇다. 


걷는다. 밤바람이 약간 서늘하다. 괜찮다. 아파트 정원 범부채 군락지를 거쳐 푸릇한 열매가 올망졸망 달린 산수유나무 옆을 지난다. 개울 쪽이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차량의 소음도 함께. 달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인다. 달무리가 없다. 바람이 차다. 잰걸음으로 걷는다. 오늘 목표는 7,000보다. 나오기 전에 걸음수를 보니 520보였다. 일부러 걷지 않으면 운동량이 무척 적은 나의 일상이다. 


인공 연못 옆을 지난다. 개구리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저 소리, 정겨운. 도시의 도로를 걷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시골의 논둑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군중 속의 고독, 뭐 그런 건가. 아니다. 어디에 있든 마음이 중요하다. 벚나무가 늘어선 길에 가로등이 환하다. 초록색 마을버스가 지나간다. 한 사람도 타고 있지 않은 버스. 모두 지친 듯 보인다. 밤이 되면 사물들은 지치고 자연은 더 활기를 띤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데 정반대다. 


푸드 트럭이 하나 서 있다. 순대를 썰던 남자가 지나는 나를 흘깃 본다. 남자는 민머리다. 완전히 밀었다. 무슨 결심을 한 걸까. 더워서 그런 걸까. 물어보고 싶다. 나는  왜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걸까. 못 말리는 호기심. 순대를 살까. 야식은 금물. 스스로 다짐하며 외면한다. 잰걸음으로 걷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민머리가 가로등 불빛에 번쩍 빛났다. 분명히 무슨 결심을 한 것이리라. 


아들이 고3 때였다. 갑자기 머리를 완전히 밀었다. 너 군대 가니? 내가 물었다. 아들은 씩 웃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구나. 스스로 다짐해야 할 만큼 큰일을. 민머리를 쏘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역시 씩 웃었다. 아들 입에서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 나올까 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각자도생이다. 알아서 해. 그게 다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들은 한동안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나중에 알았다. 더 노력하기로 한 결심의 표현이란 걸. 


아파트 주위를 돌아 푸드 트럭 앞에 다시 왔을 때에도, 남자는 여전히 순대를 썰고 있다. 손님은 없는데 저렇게 썰어 놓으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 된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오세요,라는. 이제 푸드 트럭도 전화로 주문을 받는 걸까. 그래도 다행이다. 순대가 팔리고 있어서. 다시 또 강한 식욕을 느낀다. 어서 벗어나야 한다. 걸음이 더 빨라진다. 걸음수를 본다. 6,493보. 됐다. 이제 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가면 7,000보가 된다. 


다시 범부채 군락지를 지나 진분홍터리풀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우리 동 앞이다. 가로등에 비친 꽃은 은은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한참 서서 꽃을 본다. 아,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애상적이다. 솥 적다 솥 적다로 들리면 풍년 들고, 솥 텅 솥 텅으로 들리면 흉년이 든다고 하지 않던가. 솥 텅으로 들린다. 솥이 텅 비었다니 걱정이다. 흉년이 들까 봐. 아무리 쌀이 남아돌아도 흉년은 안 된다. 밤하늘엔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 때문이리라. 


이맘때 개구리와 소쩍새 울음소리가 고향집을 휩싸곤 했다. 어머니는 저 소쩍새 울음소리를 홀로 들으시겠지. 눈물이 괸다. 자식들의 전화와 찾아오는 날만을 기다리실 텐데, 흡족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야속하다. 열 시가 넘은 이 시각, 주무실 것 같아 전화를 하지 못한다. 잠을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고향 하늘 쪽을 향해 혼잣말을 뇌까린다.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니 저 소쩍새 소리를 더 듣기 위해, 아파트 정원을 한 바퀴 더 돈다. 윗동 쪽으로 가는 오솔길. 꽃향기가 진하다. 쥐똥나무다. 양쪽으로 늘어선 쥐똥나무에 작고 하얀 꽃이 앙금앙금 피었다. 너구나, 네 향기가 이리도 진하구나. 허리를 굽혀 꽃향기를 맡는다.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꽃향기. 마음이 가벼워진다. 


집에 돌아와서 걸음수를 확인했다. 9,000보 가까이. 시간은 11시가 다 되었고. 잘했다. 스스로 칭찬. 귀가해서 그대로 앉으면 다시 일어서기 쉽지 않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바로 나온 게 잘한 일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어렵다.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일이어서. 매일 걷기는 이제 3년 6개월이 돼 간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 한 매일 할 일이다. 매일 할 일이 하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 하나 더 있다. 그건 글쓰기다. 


습관처럼 하는 걷기처럼 글쓰기도 그래야 한다. 밤이든 낮이든 시간만 되면 걸으려고 나가는 것처럼, 글이 되든지 안 되든지 일단 시작해야 한다. 그 후에 써야 한다. 한 단어, 한 문장, 한 단락. 걷다가 만나는 사물이나 자연이 있는 것처럼, 쓰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뭘 쓸까 싶지만 가만히 보면 쓸 거리가 많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거다. 진분홍터리풀, 푸드 트럭, 개구리울음, 소쩍새 소리, 쥐똥나무 꽃, 밤바람, 구름 속의 달 등.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걷기와 글쓰기를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걸으면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매일 하는 글쓰기도 저력이 생길 것을 믿는다. 오늘도, 나는 걷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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