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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08. 2023

집주인과 세입자

시작

    

세상에나.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독립하면 결혼해서 손주 안고 올 줄 알았는데. 손주커녕, 결혼커녕. 십 년 전에 독립 선언하고 집 나간 아들이 나이만 십 년 더 들어 들어왔다. 기어들어 왔다고 할 수 없지만 심정적으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점잖은 체면에 그럴 수 없을 뿐. 기어들어왔든 그냥 들어왔든 어쨌든 돌아왔다. 손주도 마누라도 없이 홀로 그것도 나이만 들어. 누군가는 말했다. 아들들은 따로 살면 불편해서 바로 결혼한다고. 그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아들은 아니었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엄밀하게 말하면 홀몸으로 기어, 아니, 들어온 건 아니다. 뭔 짐을 한 트럭이나 싣고. 누구와 살림 차렸던 것도 아니건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 많은 물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니다. 하긴 유목민이라면 모를까, 정착민으로 살아온 사십이 년을, 집 떠났다고 넘어설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 원룸에서도 저리 많은 살림도구가 필요했다는 게. 이사 오기 전에 웬만한 것은 다 버리고 오라고 했건만. 남은 것이 저 정도니 말 다했다. 


이삿짐이 들어오던 엊그제 나는 죽었다 살아났다. 방 세 개 내가 다 썼는데, 하나를 아들에게 내주어야 했으니까. 그것도 메인인 안방을. 에어컨도 그렇지만 발코니 있는 방이 좋다나 뭐라나. 그래, 이왕 들이기로 했으니 세입자 마음에 들게 해주자 싶어, 덜컥 안방을 내준다고 했다. 파우더 룸과 화장실이 딸린 방. 안방마님이 써야 하는 방을 세입자에게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확실히 마음씨 좋다 못해 정신 나간 집주인이다.  


이틀 전에 잠시 들른 세입자, 그래 이제 아들이 아니고 세입자다. 한 달에 일정액을 지불하기로 했으니 세입자 맞다. 쥐꼬리만큼이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다더니, 그냥 살겠다고 하지 못하겠는지 관리비 정도는 부담하겠다고. 세입자라고 지칭하니 확실히 마음이 낫다. 으아악! 내가 집주인이 되다니, 그것 역시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은근히 괜찮다. 이제부터 엄마가 아닌 집주인으로 부르라고 하리라. 세입자가 흔쾌히 그럴지 모르지만. 안 부르면 방 빼!라고 소리칠 거다. 


아, 분노는 금물. 난 점잖은 사람이니까. 세입자는 앞으로 사용하게 될 안방을 요리조리 살피고, 줄자로 재고, 적고, 파우더 룸 한쪽에 있는 붙박이장을 열어보고, 서랍도 빼보고, 발코니에도 나가보았다. 까다로운 세입자. 누가 쫄 줄 알고. “너 뭐야! 왜? 불만 있어?” 소리치며 도끼눈을 떴다. 여유로운 세입자, 씩 웃는다. 김 빠지게. 침대와 책상, 행거, 서랍장 등을 어떻게 놓을까 보는 거라나 뭐라나.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 “왜! 이삿날 너 없어?” 세입자는 너털웃음. 머털도사도 아니고 웬 너털웃음. 머털도사가 너털웃음을 웃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인데. 아, ‘털’이라는 한 음절이 일치돼서 떠오른 생각인가. 아무튼. 불길한 예감은 적중 비율이 높다. 일이 바빠서 짐만 실어 보낸단다. 강의가 있고, 작업실에서 할 일이 있다고. 세상천지에 이사하는 날 세입자가 안 오고 이삿짐만 부려놓는다니. 이 말도 안 될 일을 머털웃음 아니 너털웃음으로 눙치는 인간은 누군가. 바로 마흔두 살 내 아들이 아닌가. 한숨만 휴, 휴. 쉴 휴(休)는 절대 아님. 


정작 세입자는 천하태평. 이삿짐센터에 위치를 말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바꾸면 되다나 뭐라나. 퍽도 생각해 주는 척, 지 아비를 닮아도 저렇게 닮을 수 있나. 평생 세입자의 아비가 한 말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온갖 걱정 다하게 해 놓고 정작 본인은 천하태평. 미안한 마음이 들면 걱정하지 말라니.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수 있는 건가. 말로 떡을 하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는다던데, 말은 누가 못 하랴. 징글징글. 


이삿날 미리 공지한 대로 세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삿날을 잡은 건 세입자다. 아무리 보증금 주고받을 처지가 아니라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전화만 한 시간마다 해댔다. “전화하지 마! 바빠!” 힘이 들어 새된 목소리만 나왔다. 소용없다. 수업 중 쉬는 시간에 하는 거라며, 얼마만큼 진행되었는지 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오방난장이 된 거실과 주방 사진을 찍어 보냈다. 이런 젠장! 자기 방 사진도 찍어 보내달란다.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달란다는 격 아니고 뭔가. 이 마음씨 좋고 점잖은 집주인은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세입자의 방까지 찍어 전송하는 친절을 베풀고 말았다. 


세입자는 겨우 한마디 했다. 이제부터 손대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자기가 와서 다 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이고 뭐고 할 것 아닌가. 발 디딜 틈도 없는 집에서 손 놓고 있을 집주인이 어딨다고. “됐어! 앞으로 전화나 하지 마!” 화내고 소리치는 쪽이 지는 건 맞다. 아니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건가. 우렁쉥이처럼 어미 속을 다 파먹고 마는 자식들. 그래도 기꺼이 내주는 어리석은 인간이 어미라던가. 어미 품으로 기어든 자식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도 어미는 어민가보다. 


결국 세입자는 다음날 들어왔다. 그것도 밤이 다 되어서. 나는 치우고 정리하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증이 생겨 걸음도 딛기 힘들었다. 그래도 사진 속의 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는지. 둘러보더니 흠, 한숨인지 그냥 숨인지 내쉬는 세입자. “저녁이나 드시러 가죠.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어이상실이다. 이 오방난장인 짐을 두고 먹자는 말부터 하니. 하긴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다 먹기 위해 사는 거니까. 집에서 대충 먹자는 나의 등을 밀어대는 세입자. 못 이기는 척 근처 식당으로 갔다. 주방이 엉망이라 해먹려야 해먹을 수도 없는 지경. 


뭐가 좋은지 세입자는 싱글벙글. 집주인은 저녁 굶은 시어머니 얼굴. 대조적이다. 온통 몸이 쑤시고 아파 견딜 수 없다. 수시로 어깨와 팔을 주물러주는 세입자, 어쩌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 않던가. 저 느물거리는 마흔두 살짜리 세입자와 살아갈 일이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만 나이로 하니 마흔둘이지 우리 나이로 마흔세 살. “어이! 돌아온 탕자, 기분이 어떠신가? 넌 오늘부터 세입자야. 집주인으로 깍듯이 모셔. 그래도 우리 집에 입성한 것을 환영한다.” 내 말에 또 너털웃음. 그놈의 너털웃음은.


식후 한 시간 동안 산책로를 세입자와 걸었다. 급 사이좋은 모자(母子) 모드. 가끔 손을 잡았다 놓고, 어깨도 주물러 주는 세입자. 그래, 세입자가 됐든 아들이 됐든 같이 한 번 살아보자. 지지고 볶고. 때론 갈등하다 화해하고, 알콩달콩. 나도 오늘부터 방 한 칸, 그것도 안방을 내준 집주인이다. 어디, 집주인 행세 좀 해볼까. 그게 싫어 방 뺀다고 하면, 그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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