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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Dec 31. 2021

<라라랜드>. 당신에게 '꿈'이란 무엇인가요?

서울이 LA가 될 순 없겠지만, 당신이 꿈을 꾼다면

// 이 글에는 <라라랜드>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글이 깁니다. 라라랜드를 진정 사랑하는 분들만 읽어 주세요.

// 영화를 한 번 더 볼 여유가 있으시다면, 꼭 그러고 나서 읽어주세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나의 삶도 내일이면 반 오십이라는 숫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뭐라도 돼있을 줄 알았던 25살, 나는 아직도 내가 원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아직도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데미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알을 깨뜨릴 자신조차 없는 나다. 그래도 자부할 수 있는 것은, 꽤 많은 영화를 보면서 일천한 삶의 경험에서 벗어나려 애썼다는 것이다. 시네마에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맞을 때면 아직까지 당혹감을 멈출 수 없다. 스콜세지의 갱스터 필름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기괴한 영화 세계도, 박찬욱의 모든 영화들도 다 사랑하는걸. 단 하나의 작품 테두리에 나의 영화관을 가두어 버리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선택받지 못한 그 모든 영화들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해!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작품은 분명 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번 나에게 눈물과 미소를 한결같이 선사하는 마법의 영화. 바로 데이먼 셔젤의 <라라랜드>다.




  사실 뮤지컬이라는 장르영화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아름다운 노래 선율에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대화 중 뜬금없이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감정선이 곧장 깨지곤 한다. 스토리라인의 측면에서도 일과 사랑 사이의 선택, 청춘의 쓰라림이라는 주제는 어쩌면 뻔하고 뻔한 클리셰다.

  하지만 라라랜드에서만큼은 그것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채로운 색감의 미장센, 말할 것도 없는 완벽한 음악과 화면의 조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쥘 만큼의 대단한 연기. 칭찬받아 마땅한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랜드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영화적 화술에 있다.



  <라라랜드>는 절대 관객이 원하는 대로 영화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Another Day of Sun'이 흘러나오는 전설적인 오프닝 씬부터가 그렇다. 꽉 막힌 LA의 고가도로. 반팔 투성이인 인물들 속, 오프닝의 계절 자막은 바로 '겨울'이다.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겨울이라니? 관객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 영화는 한 술 더 뜬다. 갑자기 사람들은 차 위에 올라서서 칼군무를 선보인다. '고향을 떠나온 소년이 내 노래를 듣고 꿈을 향해 나아갈 힘이 생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OST 가사처럼, 겨울의 차가움은 이들의 열정과 낭만을 얼릴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순간 가차 없이 곡은 끝나고, 사람들은 차 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들리는 끊임없는 클락션 소리.

  그렇다. 이곳은 자신의 꿈을 노래하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현실 속으로 돌아가 다시 투쟁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꿈꾸는 자들의 도시다. 이곳이 바로 라라랜드다! 배짱 두둑한 이 오프닝의 선언에서부터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뭔가 다르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배우를 꿈꾸지만 번번이 냉혹한 오디션에 좌절감을 맛보는 미아. 전통 재즈에 관해 강력한 신념을 지녔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느끼는 세바스티안. 둘은 고속도로의 마주침 이후에 카페에서 재회한다. 사장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재즈를 연주하던 세바스티안이 해고를 당하는 씬. 망연자실한 표정의 세바스티안에게 미아는 말을 건다. 그리고 가볍게 무시당한다.

  이후의 전개를 기대하는 관객을 농락하듯, 화면은 곧장 세바스티안의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왜 그 카페에서 그가 피아노를 치게 되었는지, 플래시백을 통해 짧게 전달한다. 그러고는 영화는 다시 한번 미아의 과거로 돌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비춘다.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왔지만, 꿈에 대한 기대와 좌절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두 인물. 동떨어진 각자의 과거를 어떻게 설명하고, 둘의 서사를 어떻게 이어 붙일 것인가? 감독은 '음악'이라는 마법을 통해 시공간의 공백을 훌륭하게 바금질 해낸다.


그들의 만남은 음악으로 매개된다.


 이렇게 관객의 기대에 엇나가는 영화적 서술 방식은, 두 인물 간의 감정을 담아낼 때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파티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그리피스 공원에서 미아와 세바스티안은 'A Lovely night'에 맞춰 숨 멎을 정도로 낭만적인 춤을 춘다. 기막힌 석양 아래 모두가 키스를 기대하는 순간, 미아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관객의 기대는 무산된다. 이후 둘은 영화관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가슴 설레는 분위기 속에 손잡기까지 성공한다! 그렇다면 키스씬은 자연스레 이어져야 할 테지만, 이번엔 영화 필름이 타버리면서 영화관의 불이 켜져 버리고 만다. 관객의 기대는 다시 한번 퇴짜 맞는 것이다. 잔뜩 약이 오른 관객들은 두 인물이 천문대로 향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천체투영관에서 'Planetarium'이 울려 퍼질 때, 두 인물은 뜬금없이 비행을 시작한다! 갑자기 하늘을 난다고? 현실성을 생각한다면 배짱이 필요한 연출이지만, 이는 전혀 영화적 만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미아는 이전 씬 - 삽입곡 'One in a Crowd' 가사- 에서 '날개를 달아줄 이'를 계속해서 찾고 있지 않았던가. 보란 듯이 등장한 세바스티안이 바로 그 사람임을 입증하는 이 영화적 화술에, 관객들은 알게 모르게 설득당해 있다. 결국 우리는, 숨 막히는 그들의 비행을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고도 강렬한 그 순간, 그들은 별들의 도시 -City of Stars- LA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된다. 전반부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 빌드업 끝에, 마법 같은 비행 후의 두 남녀는 드디어 키스에 성공하고야 만다. 두 번이나 퇴짜를 놓으며 관객의 기대감을 대폭 낮춰놓고서는, 되려 놀랄 만큼 달콤한 경험을 선사하는 놀라운 연출은 그렇게 우리의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아와 세바스티안은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시작한다. 미아는 세바스티안이 그의 동료 키이스의 밴드에 들어가, 현실에 안주하고 자신의 음악을 포기하는 것을 막는다. 전통 재즈를 향한 그의 열정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꿈을 포기하는 거잖아.
사람들은 열정에 이끌리거든.
자신들이 잊은 것을 다시 일깨워 주니까."


  한편 세바스티안은 어떤가. 오프닝의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부터, 클락션을 통해 미아에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임을 알려주던 이가 아니던가. 그는 단독극의 대실패라는 쓴맛을 맛본 미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변함없이 경쾌한 클락션 소리로 희미해져 가는 그녀의 꿈을 다시 심어 준다. 이렇게 그들은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있을지 모르는 꿈을 향해, 계속해서 서로를 끌어준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직진하던 그들은, "Where are we?"라는 커다란 물음을 마주하고야 만다. 꿈과 사랑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온 것이다. 이에 세바스티안은,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고 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훤한 대낮에 천문대의 밝은 풍경을 바라본다. 여기서 카메라는, 그 풍경을 비춰주지 않는다. 먼발치서 인물들의 뒷모습만 딥 포커스로 잡아주고, 순식간에 영화의 플롯은 5년 뒤로 넘어가 버린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 -즉 미래- 이 무엇일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그 긴 세월의 간극으로 관객을 초대하여, 당신이라면  꿈과 사랑 중에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 둘이 바라보는 곳을 볼 수 없다

 

 고민에 빠져 있는 관객을 두고, 영화는 저만치 앞서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5년이 흐른 뒤 다시 겨울이 되어 있다. 미아는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되었고, 세바스티안은 재즈바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열정을 가지고 꿈을 좇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그런 유치한 상업 영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어김없이 관객의 기대대로 흘러가는 것을 거부한다.


  미아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녀 곁에 있는 남자는 세바스티안이 아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이 차린 재즈바의 이름은 SEP'S다. 원래 전설적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에 대한 리스펙으로 재즈바의 이름을 'Chicken on a Stick'로 지으려 했지만, 미래의 그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SEP'S라는 가게 이름은 그것을 지어준 미아에 대한 헌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중적으로 전통에 대한 세바스티안의 미세한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은 원래 타협이다. 사랑과 꿈을 모두 움켜쥘 수는 없었듯이 말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재즈조차 - 어느 악기가 어느 타이밍에 연주될지에 대해 항상 충돌하는 - 타협의 음악이 아니던가.


  이 모든 어긋남을 느끼며 모두가 쓴웃음을 지을 때 즈음, 카페에서 둘의 첫 만남 때 등장한 세바스티안의 반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고야 만다. 정말 마지막으로, 음악은 모든 것을 초월해 이 둘을 다시금 처음의 그 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스크린은 그 모든 '만약'들 -관객이 미아와 세바스티안에게 기대한 모든 낭만, 어쩌면 그 이상- 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마치 이 세상 마지막 로맨스 영화처럼.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뽑아내어 폭죽처럼 터뜨려낸다. 깊은 실망을 안긴 이후, 관객이 그토록 바랐던 그들의 이야기를 만약의 화법으로 보여주는 연출의 끝에서, 우리 모두는 시공간을 벗어나 이 영화를, 이 순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상상하는 '만약'의 순간


  달콤한 상상 끝에 현실로 돌아온 마지막 두 인물의 표정 클로즈업에는, 꿈을 좇는 이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듬뿍 드러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당연히 우린 돌아보곤 한다. 그 모든 만약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열하게 직진했던 이들의 마음속에서는, 그 상상조차 후회가 아닌 오늘의 꿈을 좇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다시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게 한다. 5년이 지난 후, 그들은 그렇게 성장해 있다.



  이제 모든 황홀한 경험을 뒤로한 채, 관객들은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꿈꾸는 바보들 -The Fools Who Dream- 을 위해 <라라랜드>가 만들어졌다면, 그 '꿈'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재즈바를 차리는 데 성공한 세바스티안이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고,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일까?  전통만 고집하면서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냐는 동료 키이스의 말에 대해, 세바스티안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혁명을 일으키는 뮤지션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라라랜드에서의  '꿈'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이게 다 꿈에 대한 영화인데, 꿈이 목표가 아니라면, 도대체 꿈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힌트는 엔딩에서 찾을 수 있다. 둘의 마지막 눈빛 교환 이후 이어지는 마지막 쇼트는, 세바스티안이 새로운 연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장식된다.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재즈바를 차렸지만 혁명가가 되지 못한 세바스티안의 선택은, 여느 때처럼 계속해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꿈이란 단순한 목표가 아닌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되어야 한다. 죽어가는 전통 재즈를 지켜내는 것. 자신의 신념을 결과로 증명해 내는 것. 그 과정에서 빛나는 가치야말로 그가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는 진짜 이유다.  결국 <라라랜드>는, 그렇게 계속해서 타협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꿈꾸는 모든 이들을 위한 찬가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치기로 한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미아와 세바스티안은 꽉 막힌 도로 오프닝의 수많은 인물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두어 시간 남짓, 우리는 꿈꾸는 수많은 이들 중 단 둘의 인생을 들여다봤을 뿐이다. 가치를 쫓는 두 사람의 이야기조차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렇다면 60억이 모인 우리 세상은 먼발치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돌아오는 길, 우연히 카페에서 흘러나온 음악을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멜로디 속에, 그 가게 속에 들어있을 한 사람. 또 다른 세바스티안의 서사를 상상해 보게 되었다.

그 속엔 라라랜드의 청춘처럼, 한 인생의 여러 굴곡들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각자의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만들진 이 세상을, 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토록 영화와 닿아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야 말로 <라라랜드>가 염세적인 나에게 전하는 초월적 마법이자, 영화적 기적이 아닐까.


  세상은 상상처럼 아름답지 않고, 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힘은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황홀 뭉클한 감정과 함께 살아갈 동력을 잔뜩 선사하는 영화가 있다면, 낭만을 다시금 찾게 하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의지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은 헛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 자학하는 순간이 언젠가 나에게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극 중 미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때의 내가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연주를, <라라랜드>를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이 사랑스러운 걸작은 영화 밖의 우리에게, 가치를 쫓는 그 의지 자체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만 한다.


니체의 말은 <라라랜드>와 닿아있는 듯 하다.

미아와 세바스티안이 이토록 빛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꿈꾸는 자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구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꿈'이란 무엇인가요?

세바스티안의 연주가 구독자 여러분들의 가슴에도 닿길 바라며.


24살의 이승민도 안 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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