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HAN Dec 18. 2020

당신과 나의 경계에서

백수린, <여름의 빌라>에 대한 단상

주아(나), 지호, 당신(베레나), 한스, 레오니, 캄보디아, 2016년 12월 카이저빌헬름 교회 앞 트럭 테러


'기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기만은 어떻게 발생할까. 그리고 그 방향성은 어떻게 따져야 할까.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기만했다고 할 때, 기만하려는 나의 의도로부터 기만은 발생하는가, 아니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기만 당했다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기만은 발생하는가. 기만이 성립되는 상황은 오롯이 주관적으로 판단되는 것일까? 아니면 일정 부분은 객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것일까. 백수린의 단편 <여름의 빌라>는 '기만'에 대한 다소 복잡한 생각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주아)와 지호는 여름의 한때를 같이 보내지 않겠냐는 당신의 제안을 받고 시엠레아프로 향한다. 스물한 살 때 배낭여행으로 간 베를린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나'와 당신-한스 부부는 십 년 넘게 연락을 주고 받아왔다. 지호와 '나'는 부부이지만 둘 다 대학 시간강사를 하고 있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교수임용에서 번번이 밀린 지호는 어느 순간 학문에 대한 자신의 열정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지호와의 위태로운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당신의 초대에 응했던 것이다. 여름의 빌라에서 오랜 친구들과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나면, 한국에서의 고단한 일상이 조금은 견뎌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가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이들의 차이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곳이었다.

  바욘 사원, 톤레사프 호수 등을 관광하며 즐거워하는 일행인 동시에 당신과 한스는 독일인이었고, '나'와 지호는 동아시아인이었으며, 대체로 웃통을 벗고 있고 관광객들에게 바나나를 파는 이들은 캄보디아인이었다. 피부색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외양은 이들을 부와 빈곤으로 경계 짓는다. 이들 사이에 어떤 동일성으로의 상상력도 가로막는다. "불행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의 천성이 경이로워"(62쪽)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지호는 화를 내며 말한다.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캄보디아 사람들이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거야? 홍수가 났는데, 침수되는 집을 보면서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나라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이 나라의 상황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낭만이니, 평화니, 그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프랑스가 아니니까 미국이 아니니까 독일은 상관없다 이거야?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뿐이라고." (65-66쪽)


  지호는 폐허가 된 사원들, 빈곤, 벌거벗은 아이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당신과 한스의 태도가 기만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곳의 빈곤에 기여한 국가의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피해를 끼친 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결국' 기만일 수밖에 없을까….

  지호의 시각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지호가 틀렸다고 온전히 주장할 수 있으려면 관광객과 현지인의 입장을 뒤집은 상태에서도 당신과 한스의 태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캄보디아인의 입장이 되었을 때 그러한 생활이 건강하다고, 관광객들에 대한 분노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지호의 시각은 부정될 수 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명확한 논리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기억들이 있다. 당신과 한스가 스물한 살짜리 동양인 여자애를 집으로 초대한 기억,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영역본을 선뜻 선물로 건네준 기억, 이후 지호의 유학길을 따라 독일로 온 '나'에게 당신이 "주아, 너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자유가 있단다."(51쪽)라고 말해준 기억. '나'에게 베풀었던 당신과 한스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관심은 기만일까?

  시엠레아프에 머문 지 나흘 째 되던 날, '나'는 당신과 한스의 손녀인 레오니를 데리고 강가를 산책한다. 레오니는 바닥에 돌멩이로 '나'와 자신을 둘러싼 커다란 네모를 그린다. 그 모습을 본 한 캄보디아 소년이 다가온다. 레오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년과 자신 사이에 있는 선을 지우고 소년의 뒤쪽으로 선을 다시 긋는다.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71쪽) 레오니가 '나'에게 말한다. 이건 기만일까? 결국 기만일 수밖에 없을까?


당신과 나의 경계에서

  동일성 혹은 공통지점을 상상하는 일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 당신과 한스는 2016년 12월에 카이저빌헬름 교회 앞에서 발생한 트럭 테러로 딸(레오니의 엄마)을 잃었다. 카이저빌헬름 교회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는 이 교회 앞에서 트럭 테러로 인해 열두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


파괴가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좋은 것이라고 가이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지호는 파괴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새롭게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죠. 혁명. 나는 혁명, 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속으로 되뇌어봤습니다. (56쪽)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그렇지, 베레나?" (65쪽)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는 파괴뿐일까? 파괴가 가져오는 결과란 과연 역사의 원점인가? 폭력과 파괴를 배제한 노력은 결국 기만으로 귀결되는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는다는 말은 자칫 순응주의라고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딸의 죽음을 겪은 후에 얻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넘지 못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끔 만든다.

  이 소설은 어떤 정답을 내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나'는 당신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71쪽)라고 말한다. 다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레오니가 그린 네모처럼 우리 사이에, 당신과 나 사이에 그어진 경계에 대한, 그리고 그 경계가 때로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변경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그런 상상의 여지를 말이다.

이전 01화 Here's looking at you, ki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