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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Oct 08. 2021

Here's looking at you, kid*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정미화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

 전쟁**이 끝난 뒤 1923년 6월의 어느 날,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사는 귀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파티를 열기로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열기로 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다. 런던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남편 리처드 댈러웨이에서부터 옛 연인이었던 피터 월시, 이제는 로시터 남작부인이 된 오랜 친구 샐리 시튼, 참전으로 인해 PTSD를 앓고 있는 청년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그의 아내 루크레치아 워렌 스미스, 전형적인 런던 상류층 휴 휘트브레드, 냉정하고 위선적인 의사 윌리엄 브래드쇼 등이다. 클라리사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 런던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런던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형도*** 같다.

 이야기는 파티가 열리는 날 아침, 인도에서 돌아온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의 집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피터 월시는 부어턴에 살던 젊은 시절 클라리사의 연인이었으며, 문학을 사랑하고 사회문제에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건설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을 뿐더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지나친 나머지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딱히 일군 것이 없다. 그는 클라리사와의 연애에 실패한 이후 인도로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인도로 가는 배에서 만난 여자와 금세 사랑에 빠져 철없는 결혼을 하고, 인도에서 또 다른 여자(데이지)와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 그녀는 인도 주둔군 소령의 아내이며, 자식이 둘이나 있다. 데이지와의 결혼을 위해 이혼 문제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다시 런던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홀린듯 클라리사를 방문한다. 여전히 자신과 그녀 사이에 사랑의 불씨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더 이상 자신의 옛 연인이 아니었으며, 어엿한 런던의 상류층 부인이 되어있었다.

 피터 월시는 그런 클라리사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클라리사 역시 피터 월시가 찾아온 이후 어떤 충동에 휩싸인다. 계속해서 피터 월시라는 존재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피터 월시가 아닌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과거에 사로잡히게 된다. 클라리사도 한때 그와 열띤 토론을 벌이는 급진적인 면모를 지녔었고, 오랜 친구 샐리 시튼의 호기로운 면모를 사랑했다. 하지만 리처드와의 운명적인 결혼 이후 평온한 나날 속에서 젊은 날의 불안과 혈기를 잊게 되었다. 클라리사는 파티가 성공적으로 열리지 못할까봐 걱정하면서도 공허함과 고독을 느끼는데, 그건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단지 자기답기를 바라지 않았나? 그녀는 창밖으로 건너편 집에 사는 노부인이 계단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올라가고 싶으면 계단을 오르고 멈추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창밖을 내다보는 저 노부인에게 어찌 된 일인지 존경심이 들었다. 그 모습에는 어떤 엄숙함이 있었다. (p.226)


 피터 월시라는 과거의 연인과 더불어 전쟁이 끝난 후 바뀐 런던의 묘한 공기가 클라리사를 그러한 고독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런던의 거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는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인데,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30대 청년이며, 클라리사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고 당연히 파티에 초대되지도, 참석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셉티머스는 소설 내내 클라리사의 거울 속 뒷모습처럼 등장한다. 애를 써도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셉티머스는 경매, 감정, 부동산 중개 따위를 하는 회사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터에서 친구 에번스를 잃으면서 외상을 앓게 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셉티머스는 휴전 협정 후 배정받은 밀라노 숙소에서 아내 레치아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통해 생기와 안락함을 느끼게 됨을 깨닫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 그들이 런던에 온 이후 셉티머스의 상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희망을 얻기 위해 찾아간 홈스 선생과 유명한 의사 윌리엄 브래드쇼에 의해 오히려 전쟁의 상처가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셉티머스는 그들의 속물적이고 비인간적인 본성을 단숨에 느끼고, 그런 '인간 본성'이 초래한 비극인 전쟁의 상처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핑곗거리는 없었다. 의사가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 본성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한 죄,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죄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에번스가 전사했을 때에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 부분이 최악이었다. ... 그런 비열한 인간에게 인간 본성이 내릴 수 있는 판결이란 결국 죽음뿐이다. (p.165)


 셉티머스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클라리사는 파티에 온 브래드쇼 부부로부터 셉티머스라는 청년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다. 기묘하게도 클라리사는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청년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즐거운 파티에서 굳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래드쇼 부부를 속으로 비난하면서도, 셉티머스가 느꼈던 기분과 했을 법한 생각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자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도 그랬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이 인생을 차분한 걸음으로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무력감에 압도되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런 지독한 두려움이 존재했다. ... 이런저런 일에서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찾아 불태우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게 뻔했다. 그녀는 그렇게 공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청년은 자살을 했다. (p.333)


 셉티머스는 클라리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고독이고, 셉티머스의 광기어린 죽음은 파티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둠이 언제나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음을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를 통해서, 화려한 파티와 셉티머스의 죽음을 대조함으로써 보여준다.

 그렇다면 다시 이 소설을 펼쳤을 때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그럼에도 클라리사는 왜 파티를 여는 것일까? 여러 인물들의 시선에서 클라리사는 속물적인 면모를 지닌 런던의 상류층,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여성,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지닌 여성 등으로 표상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고독한 호스트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 그녀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 그건 정말 기이했다. 사우스켄싱턴에 누군가가 있는가 하면, 베이스워터에도 누군가가 있었고, 메이페어에도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이 사람들의 존재를 계속해서 느꼈다. 그렇지만 대단히 소모적이고 유감스러우므로 그들을 한데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결합시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거지. 그런데 누구를 위한 거지?
 어쩌면 의식을 위한 의식일 것이다. (p.218-219)
한 청년이 자살했지만, 그녀는 그가 불쌍하지 않았다. 시계가 한 번, 두 번, 세 번 울렸다. 그 청년이 불쌍하진 않아. 이 모든 것은 계속되잖아. 봐! 저 노부인도 불을 끄잖아! 이제 온 집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계속되잖아. 그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p.335)


 죽음과 삶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불안 속에서, 이를 테면 클라리사는 삶을 지속시키는 고독한 bellman****인 것이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속되는 삶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삶은 죽음과 평행선에 놓인 모순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지속되는 삶과 존재들. 클라리사는 그들을 위해 파티를 연다. 그러므로 파티는 역설적으로 삶에 바치는 제사이며, "일종의 의식"이다.

 그래서 결국 클라리사와 샐리 시튼, 피터 월시의 만남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파티가 시작되고, 호스트인 그녀는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작 오랜 친구인 샐리 시튼과 피터 월시를 상대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클라리사가 파티에서 마주하려는 것이 현재의 그들이 아니라 과거의 그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퇴색시키고 유혹하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샐리는 결국 클라리사와 마주하지 못하고 파티장을 떠난다. 피터 월시는 불현듯 어떤 감정을 느낀다.

 

"나도 가야겠어요." 피터는 이렇게 말하고서 한동안 더 앉아있었다. 이 두려움은 뭘까? 이 황홀감은 또 뭐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사롭지 않은 흥분으로 나를 채우는 이것은 뭐지?
 클라리사로군. 그가 말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p.350-351)


 피터 월시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마찬가지로 클라리사를 통해 불려나온, 젊은 날 자기 자신과 마주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감정이다. "그곳에 그녀가 있"는 것처럼 사회 변혁을 꿈꾸던 반항아 피터 월시도 그곳에 있다. 비록 그것이 죽음과 마주하는 두려운 순간일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만약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p.332)라고 중얼거릴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의 반복이 결국 삶의 본질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 "Here's looking at you, kid"는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대사에서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1914-1917)

***번화하고 북적이는 런던의 지형도는 신화화되지 않은 “지금, 여기”의 현재성에 내포된 삶의 다양성과 활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김영주, 「근대성과 런던의 지형학: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p.228.)

****bellman (종 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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