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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Dec 30. 2020

가능성의 세계

리뷰 <그리고 베를린에서>, 2020, 넷플릭스, 4부작

에스티 샤피로(슈바르츠), 얀키 샤피로, 모이셰, 레아 만델바움, 로베르트, 야엘, 다시아


*해당 글에는 <그리고 베를린에서>(마리아 슈라더, 2020)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벌어진 일을 두고 "~ 사건이 일어났다.", "그건 중대한 사건이야."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때 '사건'이란 다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기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 차례에 거친 세계대전은 분명 전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 지닌 최고 능력이라고 여겨지던 이성에 대한 의심과 반성이 촉발되었다.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이라는 유래 없는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2차 세계대전 이후 하이데거는 마침내 형이상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후 학문들은 더 이상 인간의 위대함을 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역사가 후퇴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독일의 씻을 수 없는 수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 이후의 상상은 모두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대개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건은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그로부터 삶의 양식과 의미체계가 변화하고, 우리는 그 이후의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되돌아가려는 사람들과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데버라 펠드만(Deborah Feldman)의 소설 <언오소독스 : 내 하시드 뿌리의 불미스러운 거부>(Unorthodox : The Scandalous Rejection of My Hasidic Roots)를 원작으로 한다.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란 에스티는 18세가 되어 얀키 샤피로와 결혼한다. 이곳에서는 출산이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기 때문에 남녀가 결혼을 하면 1년 이내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 여인들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 코란에서 출산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홀로코스트로 인해 감축된 인원을 하루빨리 복원하여 예전의 공동체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구체적 목표가 이들에게 주어져 있다.

  에스티는 한 번도 이곳 브루클린의 유대인 공동체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공동체에서의 생활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뿐이다. 특히 남편 얀키와의 결혼생활이 그랬다.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일들이 시어머니는 물론 시누이들에게까지 알려지고, 그들에게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일은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경건한 일을 행하는 중이라는 생각마저도 달아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스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가 계속해서 부정 당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에스티의 결혼 전 성은 '슈바르츠'인데, 유명 가수 슈바르츠의 후손이지 않을까 추측하게끔 하는 장면이 있다. 에스티는 음악에 대한 열망이 있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여성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천박하다고 여겨지므로 여성들에게 음악은 금지되었다. 음악에의 갈증이 더욱 커져만 가는 에스티는 사람들 몰래 피아노를 배운다.

  공동체의 다른 여성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티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녀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에 에스티는 마침내 공동체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결혼하기 전에 엄마가 비밀스럽게 건네주었던 서류(독일 국민 자격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가지고 베를린에 도착한 에스티는 우연히 할훌름 음악원 학생들의 합주 연습을 듣게 되고, 이곳이 자신이 꿈꾸던 곳임을 깨닫는다.


"근데 감상적으로 과거를 대하기엔 현재를 방어하기 바빠서 말이지." -야엘
"호수는 죄가 없으니까.(Well, The lake is just a lake.)" -로베르트


  베를린 사람들에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잊을 수 없는 과거이지만, 그와 동시에 벗어나고자 하는 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사건'이란 그 이전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기점이라고 말했듯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과거를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 없음을 앎과 동시에 과거를 과거 그 자체로 복원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 설치를 결정한 저택 앞 반제 호수에서 헤엄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호수는 죄가 없으니까."라는 말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쨌든 삶이 지속되는 한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역사가 또한 그 위에 쌓일 것이라는 의미다. 호수는 인간의 잔인함을 기억할 테지만, 이들의 빛나는 한때도 기억할 것이다.

  과거는 중요하다. 과거를 잊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과거를 불변하는 실체로 인식하고 다시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은 과거에 갇히거나, 또 다른 희생을 야기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과거를 온전히 복원하려는 시도로부터 모순은 발생한다. 역사는 현재가 투영된 과거이며, 언제나 현재와의 연관 아래 사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 현재를 사랑하려는 노력,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극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


  그래서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에스티가 반제 호수에서 가발을 벗고 물에 잠기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에 음악원 오디션에서 이디시어(Yiddish)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반제 호수에서 에스티가 물속에서 가발을 벗어던지면서 진정한 자신을 느끼는 장면은 유대교의 정결의식인 '미크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베를린에서>에는 남편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성들이 물에 몸을 담그는 미크바 의식 장면이 나오는데, 반제 호수에서 에스티가 물에 몸을 담그는 것 또한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 지금까지 유대인 공동체에서의 삶을 씻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의식으로 느껴진다는 의미에서 미크바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에스티는 이제 유대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 없다. 모이셰가 찾아와 협박해도, 뱃속의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막막하더라도 에스티는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뉴욕 브루클린에는 에스티 샤피로의 삶이 있지만, 베를린에는 에스티 슈바르츠의 삶이 있기 때문에. 에스티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난다.

  그러나 에스티는 과거의 자신을 전면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이 드라마를 보고 난 후에 남는 어떤 여운의 이유이기도 한데, 에스티는 유대인 공동체가 여성에게 부당하고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탈무드가 주는 교훈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에스티는 비록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도망쳤고,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지만,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가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안다. 에스티의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자신의 뿌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과거의 '나'를 전면 부정한 상태에서 새로운 '나'를 찾는 것 또한 부질 없는 일이 되기 쉽다.

  에스티는 음악원 오디션에서 이디시어(Yiddish) 노래를 부르고 베를린 생활의 첫 단계가 되어줄 음악원 지원프로그램에 합격한다.(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볼 여지가 충분하다.) 에스티가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데 에스티 자신의 뿌리가 가장 큰 기여를 한 셈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유대인 공동체에서의 에스티가 지금의 에스티와 다른 것이 결코 아니며, 언제나 현재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에스티는 공동체를 벗어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일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어쩌면 진정한 극복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이다.



*사진과 인용문 출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 (마리아 슈라더, 2020)

*<그리고 베를린에서> 마지막 오디션 장면에서 에스티가 부른 노래가 이디시어(Yiddish)라는 것은 김연수(시민기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여성, 왜 베를린으로 떠났을까>, 오마이뉴스, 20.12.21. 참조.(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703962&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이디시어(Yiddish) - 이디시어(語). Ashkenaz족(Gomer의 후손, 창세 10, 3; 후에 아씨리아인들) 유다인들의 언어. 이 언어는 10세기경 독일 지방의 방언과 섞이어서 생겼다고 한다. 이 언어의 단어 약 10퍼센트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왔고, 5퍼센트는 로마, 슬라비아, 그 밖의 국제어에서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Yiddish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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