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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Oct 03. 2021

용서도 화해도 없는 사랑

황정은, 『연년세세(年年歲歲)』, 창비, 2020

 황정은의 연작소설집 『연년세세(年年歲歲)』에 실린 소설 중에 가장 먼저 읽은 건 「파묘」이다.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하나로 실려 소설집으로 묶이기 전에 먼저 접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도 작가는 소설 끝 짧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들을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가끔은 그런 것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 작가노트 중 (황정은, 「파묘」,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 p.175.)


  「파묘」만 읽었을 때는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가족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이다. 「파묘」에는 어머니 이순일, 아버지 한중언, 장녀 한영진, 차녀 한세진, 막내아들 한만수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한다. 이순일은 어느새 늙고 무릎이 안 좋아져 이제 더는 성묘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이순일의 외조부인 지경리 할아버지의 묘를 파묘하기로 결정하고 한세진과 함께 마지막으로 산소를 방문한다. 이러한 하나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이순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순일의 남편 한중언은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p.27)이라며 지경리 할아버지 산소에 절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순일은 그런 한중언의 끼니를 평생 책임져왔으며, 맞벌이로 가사에 힘쓸 여력이 없는 한영진 부부의 살림도 도맡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표상된다. 그래서 이순일이 지경리 할아버지의 파묘를 결심하면서 그 이유로 "어차피 자기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무덤이니까."(p.18)라고 말했을 때, 이 소설은 이순일이 표상하고 있는 이미지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질서 속에 위치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평생 희생하며 살아온 이순일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그런데 「파묘」 이후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 이렇게 총 네 편이 『연년세세(年年歲歲)』라는 제목으로 엮이면서 다시 한 번 작가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게 됐다.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작가의 말 중 (황정은, 『연년세세(年年歲歲)』, 창비, 2020, p.185.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전달해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이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른들은 이순일을 '순자'라고 불렀다. 이순일은 전쟁과 전염병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철원 지경리에 있는 백부의 집에서 자란다. 그러다가 백부가 월북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지경리 할아버지의 손에 맡겨진다. 할아버지는 지독한 노인이었다. 소처럼 이순일에게 멍에를 씌우고 밭을 갈게 하고, 이순일이 굶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배만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지경리 할아버지의 지독함에 질린 이순일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나자, 그녀를 따라 김포 송정리로 가게 된다. 편히 지내게 해주고 공부도 시켜주겠다던 처음의 말과 달리, 고모네 집에는 자식들만 일곱 명이었고, 이순일은 자신까지 포함해 총 열 명의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고모는 이순일을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식모로 부리기 위해 데려왔던 것이다. 그곳에는 고모네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가는 '순자'라는 동갑, 동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순일은 순자로부터 일자리를 소개 받아 고모네 집에서 도망친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개인병원에서 이순일은 간호조무 일을 배운다. 하지만 병원에 찾아온 고모부에게 잡혀 다시 송정리로 끌려간다. 결국 이순일이 고모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결혼이었다. 이순일은 시장 상인의 소개로 한중언과 결혼한다.

 한영진은 이순일, 한중언의 장녀로, 미술 관련 학과로 진학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가계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해 결국 진학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한중언의 수술비, 각종 생활비, 한세진의 용돈과 한만수의 유학비용까지 모두 한영진의 손에서 나왔다. 실질적으로 이 집안의 가장이지만, 한영진의 남편 김원상은 그런 그녀를 무시하기 일쑤다. 예전부터 이순일은 늦게 퇴근하는 한영진을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항상 새 밥상을 내왔다.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고 월급을 받으면 그 상에 월급봉투를 딱 붙이듯 내려놓았다.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p.80) 한영진은 누구보다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장녀이지만, 그런 가족 내의 위치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포기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삶을 견디기 위해 그녀가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은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어느 순간부터 한영진의 인생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한영진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 p.84.)
그 아이가 입국해 이 집에 머물 때마다 몰래 물건을 내다버린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지냈다. 잃은 것을 잊은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면 그건 거기 있었다. ( 「무명」, p.112.)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 「무명」, p.142.)


 이순일이 잃어버린 것과 한영진이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무엇일까? 이순일은 순자의 소개로 일했던 병원의 원장으로부터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독일에서 한국 간호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자신이 잘 아는 선교사가 있으니 만약 원한다면 소개시켜주겠다는 이야기. 그때부터 독일은 이순일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았다. 평생 가본 적 없지만 언제나 동경했던 곳. 자유로운 곳. 하지만 독일이 의미하는 자유로운 삶,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이순일이 평생 잃어버린 것이 되었고, 이순일에게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강박을 갖게 했으며,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은 것뿐이라는 자기 위안을 하게끔 했다. 한영진이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p.83)이다. 이 질문은 이순일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한영진은 자신이 그 말을 엄마에게 평생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안다. 한영진이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에 받힌 외침뿐이다. 자신의 등산화를 맘대로 신고 파묘를 하러 가서 진흙 속에 박힌 밑창을 그대로 두고 온 이순일에게 화를 내며 하는 말 같은 것.


왜 그랬느냐고 한영진은 물었다.
말도 안 하고 내 걸 쓰고, 그걸 거기 버리고 왔냐고.
내 거를.
쓰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가져가서, 망가뜨리고, 버리냐고.
그걸 버리냐고.
이순일은 그것이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무명」, p.140.)


 한세진은 이 집안의 둘째로, 시나리오를 쓰는 극 작가이다. 둘째라는 위치는 한세진을 가족 구성원들과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이 때로는 죄책감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한세진은 가족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세진은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엄마와 언니와 동생의 삶을 이해한다. 한세진의 시선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가족'이라는 굴레는 기형적이고 불완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각할 뿐이다. 그들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마지막 단편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한세진의 시선으로 서사가 진행되면서 앞선 단편들에 대한 이해의 방법이 제시된다. 한세진의 연인 하미영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폭력에 의해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고,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그 여름밤이 지나고 얼마 뒤 하미영은 거실에 놓인 식탁 앞에서 뒷걸음으로 물러나다가 펠트 슬리퍼를 신은 발로 고양이를 밟았다. (「다가오는 것들」, p.147.)


 하미영은 과거의 어머니를 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결국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앞의 소설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태도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이고, 평생 아물지 않는 성질의 것인데, 이것을 사이에 두고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각 인물들이 그것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를 작가는 그저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는 관계이며, 상처의 골이 너무 깊어 서로를 용서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관계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이순일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한영진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거짓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면 자신의 상처를 덮은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 자체가 용서의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상대의 잘못을 따질 수도, 미워할 수도, 영원히 헤어질 수도 없는 상태에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그저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뿐일 수 있다. 이때 받아들인다는 태도는 체념과는 사뭇 다르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와 원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아 한센뢰베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메시지를 빌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 「다가오는 것들」, p.182-183.)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까지 알고 있던 용서와 사랑의 개념을 삶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로 확장시킨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처 입히고 상처받는 것,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 그래서 서로 화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다만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들을 겪어내는 것, 바쁘게 삶을 살아내는 것이 전부임을 작가는 이순일과 한영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도 화해도 없는 사랑이라니. 이보다 우리 삶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또 있을까? 이 소설들을 읽고 슬펐다면, 이를 차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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