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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Dec 23. 2020

기억과 이미지, 가능한 영원

<연인>, 장 자크 아노, 1992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양가휘와 제인 마치의 섬세한 연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과 이별에 몰입하게 한다. 영화만 보더라도 충분한 감동을 받을 수 있겠지만, 소설이 지니고 있는 울림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그날 소녀의 몸차림에서 대담하고 놀라운 것은 꼭 하이힐만은 아니었다.
그날 소녀는 남성용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장밋빛이 도는 일종의 펠트 모자로 커다란 검은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연인>은 뒤라스의 자전소설이다. 뒤라스는 1914년에 베트남에서 출생해 33년에 프랑스로 영구귀국했다.

  열다섯 살의 소녀는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그를 만난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서 개인 부동산을 장악한 소수 중국계 자본가였다. 프랑스 유학 중에 베트남에 와서 아버지의 사업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백인 소녀에게, 그것도 열두 살이나 어린 소녀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당시는 1930년대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베트남인이 아닌 중국인이더라도 피부색이 강력한 위계로 작동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인이었지만 가난했던 소녀와 소녀의 가족에게 그는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는 사람일 뿐이다. 아니, 그 마저도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소녀가 그와 관계를 맺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녀의 어머니와 큰 오빠는 자신들이 여전히 그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가 베푸는 선의는 물론 그와 소녀 사이에 어떤 ‘애정’이 존재한다는 상상 자체를 거부한다. 그가 소녀의 가족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은 그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내 떨치지 못하는 위계와 그럼에도 그에게서 나오는 돈을 거부하지 못하는 굴종. 그래서 더욱 소녀와 그의 관계는 철저히 거래로만 환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그는 이 사랑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내 모든 행동을 다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큰오빠의 태도를 따라 한다.
나 역시 가족들 앞에서는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앞에서 나는 그에게 절대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


  한낮의 콜랑, 어수선한 시장 한 가운데라는 독신자 아파트의 위치는 그와 소녀의 관계에 대한 은유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목받기 쉽기 때문에 더욱 몸을 숨겨야 하지만 결국 숨겨지지 않는.

  소녀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둘의 관계는 끝난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린 백인 소녀와의 결혼을 반대했으며, 이미 집안끼리 약속된 결혼상대가 있었다. 프랑스로 가는 배 위에서 소녀는 그의 차를 바라본다. 그와의 이별을 실감한 것은 이미 인도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쇼팽의 왈츠가 들려왔을 때, 소녀는 촐론(콜랑)의 그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린다.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사랑을 잃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과거를 회상하는 내레이션(narration)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의 시점이 현재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특성상 그와 소녀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훗날의 내레이션은 부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확실히 소설보다는 부차적이다. 소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음울했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그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뒤라스의 가정환경이기도 하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생계를 책임지며 세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편파적인 애정 속에서 가족 내 제왕으로 군림하는 큰 오빠, 그에게 매번 폭력을 당하는 작은 오빠까지. 뒤라스가 그와의 만남을 일년 반 동안이나 지속한 것은 그것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임과 동시에 자기 가족이 지닌 모순을 파헤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마치 물집을 일부러 터뜨리는 것에서 오는 일종의 희열처럼. 그에게서 오는 돈은 순식간에 가족 내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묘미는 이 작품이 단순히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위에 말한 뒤라스의 자전적 요소도 물론 그렇지만, 무엇보다 왈츠를 통해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장면을 소설에서 다시 읽을 때 그렇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쇼팽의 왈츠를 듣고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그러나 뒤라스는 그 감정이 쇼팽의 왈츠 때문인지, 원래 그에게 느꼈던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도양을 건너는 동안 그에 대한 기억이 내내 흐릿했다가, 왈츠가 울려퍼지는 이 순간 비로소 기억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에서의 내레이션처럼 “그를 사랑했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사랑을 잃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뒤라스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지나간 사랑을 뒤늦게 깨달았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과거는 어떤 기제를 통해 영원한 것으로 남게 되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과거는 어떻게 기억이 되는가, 에 대해.

  그렇다면 <연인>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억은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가 때로 ‘영원’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기도 하는, 그래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도 하는 그런 기억을 말한다. 발터 벤야민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라는 글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매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는 과거 자체로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영향도 주지 못한다. 과거는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만 과거일 수 있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때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발견되는 과거와 동일한 이미지일 수도 있고, 불현듯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현재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과거는 이미지의 작용을 통해 기억이 된다.

  그는 왈츠의 선율을 통해 뒤라스의 연인으로 남았다. 그는 영원히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모든 인용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07.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발터 벤야민 선집 3>>, 도서출판 길, 2007, 3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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