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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Oct 10. 2021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들

마에카와 도모히로, 『산책하는 침략자』, 이홍이 옮김, 알마, 2019

 우리가 지닌 대표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 언어이기 때문에 모든 설명을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단어와 문법을 안다고 해서 나와 상대방의 '개념'을 일치시키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쓰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고사성어가 말해주는 것이 이것이다. 책상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더 확실한 이해의 방법이다.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산책하는 침략자』는 2005년 일본에서 연극으로 초연되었고, 2007년 일본에서 소설로 각색되어 출판되었다. 그리고 2017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면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일견 언어와 개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다와 인접해있는 한 시골 마을에 괴상하고 잔인한 일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71세의 할머니 다치바나 마사코가 아들과 며느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몸마저 해부하듯이 갈기갈기 찢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손녀 다치바나 아키라(16세, 여고생)뿐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가세 나루미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중에 남편 가세 신지의 외도 소식까지 들은 참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남편 신지가 나흘 간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병원에서 발견되는데, 나흘 만에 마주한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뚝뚝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딘가 하나 나사가 빠진 것처럼 맹한 모습으로. 심지어 달라진 신지는 어느 때는 다정하기까지 하다. 나루미는 뭐가 뭔지 감이 안 오는 상황에서 달라진 신지에 대한 애정이 살아남을 느낀다.

 전쟁과 자위대에 대해 취재하러 왔다가 일가족 살인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기자 사쿠라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신지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데려다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신지가 다른 사람의 개념을 빼앗는 광경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황이지 알리 없는 사쿠라이는 단순히 이 마을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한다. 신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아키라의 집 주변을 서성거리던 사쿠라이는 아마노라는 소년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 소년은 자신을 아키라에게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묻고, 그렇다면 자신의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소년의 허무맹랑한 말에 호기심과 재미를 느낀 사쿠라이는 그 제안을 승낙하고, 아마노와 같이 다니게 되면서 이 마을을 둘러싼 사건이 단순히 흥미롭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닫는다.


"그런데 외계인이 뭐하러 지구에 왔어?"
"조사하러. 이 세계 고유의 개념을 수집하러 왔어."
"개념?"
"응, 개념. 아, 괜찮아. 당신 건 안 뺏어. 가이드니까."
"아, 그래? 고마워. 그런데 조사해서 뭐하려고? 설마 침략하려고?"
"침략해야지. 외계인이 다 그렇지, 뭐." (p.57)


 개념을 수집하기 위해 지구에 온 외계인은 세 명이다. 이들은 현재 신지, 아키라, 아마노의 몸을 숙주로 삼고 있다. 개념을 빼앗는 방법은 단순하다. 산책을 하면서 마주치는 인간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들이 특정 개념을 떠올리면 그걸 가져간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영원히 그 개념을 상실하게 된다. 이들이 빼앗은 개념에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개념도 있지만 '소유', '가족', '금지' 등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추상 개념도 있다. 이런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결과적으로 '인간성'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이를 테면 '가족' 개념을 빼앗긴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는 이후 아버지 다다시를 변태 취급하며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는데, 친구 사와키에게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히 알아. 그런데 왜 나랑 같이 사는지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친구도 아니고, 남자친구도 아니고. 너무 당당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아저씨란 말이야. 아마 보이면 안 되는 존재인데 뭔가가 잘못돼서 보이는 것 같아." (p.114)


 아스미에게 아버지는 이제 "집에 사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되고 어느 정도 개념을 축적한 외계인들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확실히 감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어"(p.152)간다. 인간들에게 빼앗은 '인간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과적으로 개념을 빼앗음과 동시에 감정 또한 빼앗게 된 것이다. 언어를 학습하는 건 단순히 AI에게 사전을 입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개념을 학습하는 건 다르다.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그 개념을 공유하는 인간들의 집단적 토대,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체계도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외계인들이 언어가 아닌 개념을 학습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개념 학습을 위해 지구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념'이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상호작용과 이해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험을 통해 학습할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고유의 '개념'이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빼앗는 개념 외에 '가이드'를 통해 간접적인 상호작용 방법 또한 학습한다. 지구에 파견(?)된 외계인 아마노와 신지가 다른 성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아마노는 사쿠라이를 만나기 전에 혼자서 개념을 수집하고 다녔던 반면 신지는 나루미라는 아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마노는 점차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간화되어 간다. 신지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은 아마노와 같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빼앗지 말아야 할 것을 빼앗은 상대에게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스미로부터 '가족' 개념을 빼앗은 후 신지의 반응이다. "... 미안해. 나루미한테 소중한 사람인 줄 몰랐어.", p.45)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루미의 애정이 신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신지는 상대방이 말할 때 짓는 표정과 말투 등을 학습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이 처음에는 흉내에 불과했지만 점차 개념을 습득하면서 더 이상 흉내가 아닌 체화에 가까워진다.

 '개념'과 '인간성'. 이 소설에서 동급으로 다루고 있는 이 두 층위는 익숙하지만 그간 쉽게 연결짓지 못했던 것이다. 이 연관성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많은 SF 작품들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때 디테일하게 설정하는 것도 이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성이 파괴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세계의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등 이러한 물음들은 SF 세계관을 구축하는 기본적 토대 중 하나일 것이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어떻게 보면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개념 빼앗기'라는 수단을 통해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전 SF 작품이다. 외계인들이 '개념'을 하나하나 빼앗는 장면을 읽는 우리들 또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게, 저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념을 축적한 외계인은 결국 인간이 될까?" 혹은 사쿠라이의 고민처럼 "외계인의 침공을 막으려면 어떤 개념을 빼앗게 해야 할까?"


"아!"
(재밌는 게 떠올랐다. 지구가 하나가 될 방법이다. 외계인에게, 전쟁의 원인이 될 만한 개념을 빼앗아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 국가, 재산, 인종, 종교? 어쩌면 아예 단결도 못 하게 되어버릴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 앉아서 침략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 (p.259)


 전쟁과 관련된 개념을 빼앗으면 인간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통합할 수 있을까? 1차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발상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마노가 거의 완벽한 냉혈한으로 각성하려는 때에, 나루미는 신지에게 묻는다.


"맞다, 신짱. 사랑이라는 개념은 뺏었어?" (p.265)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개념, 복잡한 개념은 특히 외계인들이 빼앗기 쉽지 않은 개념인데, 그 중에는 '사랑'도 포함된다. 이는 본능적으로 습득되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념들에도 층위가 있다면, 이 개념들은 다른 개념들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들이 아닐까? 개념이 문화를 축적하는 기반이라면, 그런 개념들을 축적하는 더 근본적인 기반이되는 개념들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념이 인간성의 동의어라면, 근본적인 '인간성'을 구축하는 토대가 바로 '신', '사랑' 같은 개념들인 것이다. 나루미는 신지가 떠나버리면 혼자 남게 될 자신을 위해 '사랑' 개념을 빼앗아달라고 말한다.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신지는 망설이다가 끝내 개념을 빼앗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깊은 절망이 신지를 집어삼켰다.
 지금 자신과 같은 존재를 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논리정연하게 2주 동안 일하며 쌓아올린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개념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담배 연기로 칙칙해진 벽지, 삐걱거리는 침대마저도 신지는 따스하다고 느꼈다. 창문도 없는 이 방은 마치 자궁처럼 두 사람을 품고 있었다. 신지는 이 방을 나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모양을 바꾼 세계를. 그는 이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외계인일까?
 이제, 모르겠다. (p.273)


 신지는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결심하는데, 그가 과연 어떤 일을 할 지는 읽는 이의 상상에 맡겨져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을 습득한 그가 앞으로 할 일의 방향이란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나루미와 그 세계를 지키는 방향이라는 것쯤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에카와 도모히로는 인간성의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위에서 '인간'의 개념에 대해 물을 때에 비로소 '인간'에 대한 납득 가능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작가는, 이 작품은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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