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추고 싶어

by 이유

생 미셀 거리에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바가 있다고 양치 오빠가 말했다. 네댓 명이 따라나섰다.

한국에서 살사 좀 췄던 양치 오빠가 여기는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생 미셀 거리의 레스토랑들을 지나자 재즈바의 입구가 보였다. 나는 심야 재즈바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오빠의 애꿎은 하와이안 셔츠 뒷자락을 붙잡았다. 불어 한마디를 못해도 절대 기죽는 법이 없는 양치 오빠는 한국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냈다. 우리는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좁은 계단은 마치 동굴 같았다. 동굴은 새로운 세계로 이어졌다. 노련해 보이는 밴드가 무대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대여섯 명의 뮤지션으로 이루어진 밴드였다. 흥겨운 스윙 재즈에 금세 마음이 들떴다. 그 앞에 사람들이 쌍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살랑살랑 춤을 추는 커플부터, 운동처럼 서로를 집어던지며 추는 커플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춤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입이 쩍 벌 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렇게 멋진 스윙댄스는커녕 혼자서 막춤도 춰 본 적이 없었다.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나는 나답게 멋진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혹여나 그런 상황이 생기면 그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 두려웠다. 춤을 춘다는 것은 내게, 무방비의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좋아하는 일이었다. 아마 후자의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플로어를 달구는 날고 기는 댄서들 앞에 천하의 양치 오빠도 움찔했다. 한동안 춤을 추지 않고 분위기를 살폈다. 같이 간 사람들 모두 넋을 잃고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노신사가 내게 다가왔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어떡해!

“어떡해요, 오빠.” 춤의 치읓도 모르는 나는 무례하게도 신사분을 앞에 두고 양치 오빠를 바라보며 어떡하면 좋겠냐고 말해버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 손 얼른 잡고 나가서 춰라.” 나는 다행히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노신사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갔다. “저는 춤을 못 추는데 그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사 분은 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스텝을 알아야 리드를 따라갈 텐데 총체적 난국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양 손이 신사 분에게 잡혀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발은 계속 멋대로 신사분의 발을 밟았다. 그때마다 나는 죄송하다고, '빠흐동 빠흐동'을 연발했다. 발을 밟지 않으려 바닥만 바라봤는데 그때 어디선가 음계를 비집고 양치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 들어라. 앞에 사람 눈을 봐야지 눈을!” 코치가 선수를 꾸짖는 말투였다.

아니, 근데 어떻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자의 눈을 보라는 거야. 지금 만났는데. 저주의 빨간 구두를 신은 것 같은 내 발은 어떡하라고. 얼굴을 드니, 노신사가 나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의 눈을 바라보았다. 삼 초나 지났을까. 도저히 계속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삼십 분 같은 삼 초였다. 너무나 어색했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보다 우스꽝스러울 수 있을까? 손은 파트너에게 잡혀있고, 고개는 푹 숙이고 엉 덩이는 뒤로 쭉 뺐다. 얼굴이 뜨끈했던 기억으로 짐작컨대 아마 새빨간 색이었을 것이다. 그 상태로 이리저리 뻣뻣하게 움직인다. 신사 분의 표정이 흔들렸으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인내 심을 갖고 내게서 눈을 떼지도, 손을 놓지도 않으셨다.

아, 그때 당황하지 않고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지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다가와 춤을 청하지 않았다.

파리를 떠나기 보름 전, 휴가를 얻었다. 민박집 일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언니 오빠들의 배려로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 정든 곳들을 다시 되짚으며 파리와 작별인사를 준비했다. 보름 동안 많이 걸었다. 할 수 있다면 파리의 모든 면적에 발도장을 찍고 잘 있으라고 쓰다듬고 싶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몽슈 언니와 생루이섬을 구석구석 걸었다. 베흐티용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주 작은 타르트 가게에서 아주 진한 초콜릿 타르트도 먹었다.

생루이 섬에서 시떼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 위를 걷는데 해가 불그스레 지고 있었다.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재즈 밴드가 스윙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 얼마 후 파리를 떠나야 한다니 슬펐고, 지금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마음이 벅찼다. 몽슈 언니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왜 그래 나나야.”

“언니, 저 춤추고 싶어요.”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았다. 언니도 조금 울컥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럼 추면 되지.”

언니가 확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바로 옆에서 인상 좋은 노신사들이 스윙 재즈를 연주했다. 둘 다 춤의 치읓자도 모른다. 두 팔을 맞잡고 눈을 바라보았다. 춤의 기본은 갖춘 것이다. 그리고 그저 빙빙 돌았다. 2인용 강강술래랄까. 그동안 언니와 부러움 반 두려움 반으로 지나친 파리의 광인이 바로 우리였다.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파리에서 많이 웃었다.

우리는 와하하하 웃으면서 파리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다가 함께 웃었다. 그러다가 한 명 두 명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닐곱 명이 생루이섬과 시떼 섬이 연결되는 다리 위에서 저마다의 춤을 추었다. 음악이 끝나자 모여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언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천연덕스레 인사로 보답했다.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멋진 연주를 해준 밴드에게 유로로 감사를 표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춤을 추었다. 파리에서. 마음껏 추었다. 그런 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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