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가든 스테이트

by 이유



에이제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알바를 여러 개 하면서 파리로 다시 갈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비디오·디비디 대여점이었다. 가게에는 꽤 괜찮은 스피커가 딸린 CD플레이어가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음악CD를 가져와 하루 종일 들으며 일했다.

에이제이는 거기서 만났다. 그는 미국에서 왔고, 일산의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말 수가 별로 없고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그 대여점은 오피스텔 빌딩이 늘어선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오피스텔에는 혼자 사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에이제이는 영화 취향이 좋았다. 숨겨진 보석 같은 영화들을 골라서 빌려갔다. 그가 빌려가는 것 중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기억했다가 나중에 반드시 챙겨봤다. 에이제이가 오면 반가웠지만 워낙에 그가 수줍어하고 눈길을 피해서 반갑게 헬로우, 정도만 했다. 그런데 언젠가 매장에서 zero7의 새 앨범을 듣고 있었는데, 에이제이가 반색을 하며 말을 걸었다.

“너 zero7 좋아해? 음악 정말 좋지. 이 음악 좋아하면, 피오나 애플도 좋아할 것 같아.“

그는 음악 취향도 좋았다. 그 후로 계산대에서 나누는 대화가 점점 늘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을 실컷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의 고향 뉴저지.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의 밤하늘은 서울의 파란 밤하늘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까만색이라는 것. 그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키는 나보다 한 뼘 작았다.


어느 날 그가 가게 문을 빠끔히 열더니 쑥스러운 얼굴로 이거 들어보라고 했다. 던지다시피 내게 CD를 하나 주고 급히 나갔다. 영화 ‘가든 스테이트’ OST 앨범이었다. 나탈리 포트만이 남자 두 명과 비를 맞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앨범 자켓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을 해보니, 아직 국내에 소개 되지 않은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가 잔뜩 들어있었다. The shins, Frou Frou, Iron and Wine...매일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떤 영화인지 너무 보고 싶었다. 빌려준 건가? 잘 듣고 돌려주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몇 달이 흘렀을까, 버스를 타고 홍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었다.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홍대거리가 들썩였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했다. 그 사이로 걸어가는 기타가 보였다. 크기가 사람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색의 기타케이스였다. 아마 기타가 아닌 악기가 들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기타가 걷고 있는지 생각하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이제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기타를 십자가처럼 메고 걷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버스는 교통체증에 기어가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신호등, 횡단보도,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 붐비는 홍대거리 속의 에이제이는 유난히 더 작아보였다. 검은색 기타케이스를 보고 있는데 에이제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마 후, 나는 파리행 비행기 표를 샀다.


파리는 한창 봄이었다. 자주 걷는 길에 작은 영화관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영화관 앞의 포스터가 바뀌었다. 나탈리 포트만이 남자 두 명과 비를 맞으며 소리를 지르는 포스터였다. 가든 스테이트. 그제서야 에이제이 생각이 났다. CD돌려줘야 하는데. 그리고, 그 영화를 봐야만 했다. 한글 자막 없이 영화를 보기에 영어실력이 모자랐지만, 꼭 봐야했다.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 혼자서 영화를 보았다.

가든 스테이트는 뉴저지의 다른 말이었다. 영화 OST를 외우다시피 들어서 인지, 처음 보는 영화인데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엉뚱하고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영화였다. 한국에 가면 다시 일하던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당연히 에이제이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CD를 돌려주면서 그에게 말해줘야지. 나, 그 영화 봤다고.

타국의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를 보는 일은 묘했다. 나는 그동안 친절한 한글 자막에 익숙했는데, 그런 것은 이제 없고 너무 빠른 외국어와 알쏭달쏭한 프랑스어 자막뿐이었다. 영화관 안은 아늑했지만, 낯선 언어 속에서 종종 새로운 감각의 외로움을 느꼈다. 에이제이는 이해해줄 것 같았다. 동시에 홍대 거리를 걷는 에이제이를 봤던 날이 떠올라 마음이 쓰렸다. 그가 날 봤을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한국에 가면 그와 이야기를 더 길게 나누고 싶었다. 나 사실 그 영화 파리에서 세 번이나 봤다고. 베이비 시터를 하고 나오는 무프타 거리에서 한 번, 일요일 어색하게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한 번, 잘 차려입은 커플들 틈에서 금요일의 오데옹에서 한 번.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 그리울 때 그렇게 그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고. 너와 다시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고.


여름이 한창일 무렵에 나는 대여점으로 돌아왔다. 가게 안에는 에어컨이 빵빵했고, 나는 더 자주 ‘가든 스테이트’ 앨범을 들었다.

어느 날, 가게 단골 꼬마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사람이 떨어졌어요. 저기 오피스텔에서 외국인 아저씨가 지금 막 떨어졌어요. 여기 오던 아저씨에요. 그 키 작은...


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가게를 나왔다. 그 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그는 내가 사는 곳 바로 옆 오피스텔에 살았다. 그 근처 오피스텔은 모두 같은 구조였다. 나는 그가 살던 원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높게 창이 달려있고, 복도에 집들이 다닥다닥 1층 우편함만큼이나 바짝 붙어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구조의 방이 바로 옆에 그 바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나는 그 후로 외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외국에 가게 되면 영화관을 찾아서 영화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영화관에서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모두 혼자다. 모두 혼자라,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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