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여행 가기 바로 전 날 홍대 앞의 작은 가게에서 빈티지 원피스를 하나 샀다. 터키색 바탕에 하얀색, 분홍색 꽃무늬가 가득한,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여름 원피스였다.
한참을 고민했다. 너무 과감했던 것이다. 아마도 10대의 내가 그 원피스를 봤다면 미쳤냐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설지도 모른다. 나는 옷을 스스로 고를 수 있게 된 이후부터 20대 초반까지 주로 무채색 옷을 입었다. 나에게 옷은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가려주는 가림막 같은 용도였다. 맘에 드는 옷을 입기보다, 엉덩이를 덮고, 다리를 가려주는 옷을 골랐다.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는 나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파스텔 톤의 겨울 코트를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옷이 보기만 해도 어색해서 거절했다. 그는 나의 옷차림을 몇 번 더 지적하더니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무채색 옷을 입던 시절, 나에게는 한가지 습관이 있었다. 예쁜 옷을 입은 작은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도 열중하고 그리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곤 했다.
그 원피스는 내가 그렇게 그리던 작은 사람들이 입을 만한 옷이었다.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큰 마음먹고 가는 여행인데 정말 예쁜 옷 하나쯤은 가져가고 싶었다. 가게 언니의 권유로 일단 입어봤더니 내게 퍽 어울렸다. 그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여태껏 입었던 옷 중 가장 색깔이 많고 화려한 원피스였다. 나는 세상 찬란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서 파리를 돌아다녔다.
원피스는 눈에 띄었다. 무프타 거리의 타르트 집 아주머니는 어색한 불어로 주문을 하는 내게, 원피스가 예쁘다며 음료 한잔을 서비스로 주셨다. 그 원피스를 입고 나가니, 자주 가던 크레페 집 할아버지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옷이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원피스 덕분에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칭찬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아니에요 라는 말부터 나왔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생각나는 말이 고맙다는, 메르씨 Merci 뿐이었다.
원피스를 입고 있으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 유니폼 처럼 자주 입어서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화창한 날, 일행과 퐁피두센터를 갔다. 우리는 바나나 누텔라 크레페를 먹으며 그 앞의 널찍한 광장에 앉아 멍하니 몽골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연주자가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차력사가 등장했다. 키가 2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상의는 탈의했고 가죽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윽고 한산하던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마지막 묘기를 보여주기 전, 관중을 부르기 시작했다.
“저기 파란 꽃무늬 원피스 입으신 숙녀분. “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다. 세상에! 그는 기다란 바늘이 촘촘히 세워진 침대에 누울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가슴과 배를 밟고 올라가야했다. 차력사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바늘 침대 위에 누웠다.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에 서있다는 것, 여기는 꿈에 그리던 파리라는 것, 그리고 저 얼굴이 붉은 남자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 나는 파리 한복판에서 낯선 이들과 손을 잡고 낯선 남자의 벗은 상체를 밟고 올라섰다.
커다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등에 빨간 자국이 촘촘해진 차력사는 관중들을 향해,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메르씨 보꾸! “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여 관중들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파리 여행을 다녀와서도 그 원피스를 15년 더 입었다. 그 옷은 나의 여름 유니폼이 되었고, 봄, 가을에도 어떻게 해서든 레이어드 해서 입었다. 결국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나고 밑단도 해지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그 원피스가 친구처럼 그립다.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또 다른 꽃무늬 원피스가 몇 벌 더 있다. 그리고 하늘색, 초록색, 빨간색, 알록달록한 옷도 있다.
이제 나를 더 사랑하게 된 걸까? 하지만 무채색의 옷을 입었을 때, 나에 대한 사랑이 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의 상냥한 말과 그것을 그저 감사하다고 받아들인 경험은 분명 마음에 좋은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색깔이 많아진 지금,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 기분이 훨씬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