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 지 세 달이 지나가고 있다. 히라가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와서 마트도 가고, 병원도 가고, 심지어 우체국에서 카드도 만드는 날들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열심히 실행하고 다녔더란다. 일본어에 관심이라도 있었으면 책이라도 들춰봤을 터인데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일본어학습은 중년부부의 스킨십처럼 급속도로 멀어져 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어를 모르니 놓치는 혜택, 할인등이 보였고, 지인들에게 아쉬울 때마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점점 미안해졌다. 남편도 슬슬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본인은 연구 때문에 일본어 배울 시간이 없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래도 일본 온 지 2년이 돼 가는데 소율이보다 일본어를 못하니?'
지금 딸아이는 틈틈이 우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고 있다. (엄마아빠에게 가르쳐줄 때 엄청난 희열감을 느끼는 듯했다.)
사실 쓰쿠바 시청과 연계된 센터에서 온라인으로 일본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신청은 일찌감치 해뒀었다. 세상에, 마음에 없으면 될 일도 안된다더니 신청 후 2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첫 수업을 들었다. 비밀을 고백하 자면 지난주 첫 수업도 사실은 요일을 착각해서 못 들었다....
그리고 오늘 대망의 첫 수업을 들었다. 나는 물론 왕초보단계로 신청했지만 줌으로 첫 수업을 마주하니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화면이 켜지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차례차례 들어온다. 그런데 50대 여자분 두 분이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왕초보 일본어인데 왜 고급자 분들이 들어오신 거야...'
주눅이 들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분배가 오묘하다. 일본인인듯한 분들 네다섯 분에, 첫눈에 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분들 네다섯 명이다. 가만히 수업을 들어보니 15분 전체학습, 15분 일대일 학습, 다시 15분 전체학습, 다시 15분 개인학습으로 진행되었다. 즉 메인선생님 한분이 전체학습을 이끄시고 다음에는 각각의 일본어 선생님들이 개인학습으로 학생들을 지도해 주신다. 이 시스템을 몰랐던 나는 자장가처럼 멍 때리며 수업을 듣다가 훅 들어온 개인학습시간에 진땀 꽤나 흘렸다. 집중을 안 할 수가 없는 선생님의 자상한 티칭과 호응에 일본어는 점차 외계어에서 언어로 내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일본인 특유의 하이톤으로 코코, 소꼬, 아소꼬, 도꼬를 내뱉는 선생님을 따라 나도 점차 하이톤이 되어갔다.
"코코 이즈 뵤인 데스.(여기는 병원입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하이톤과 미소가 장착된 나의 얼굴이 낯설었다. 너는 누구니?
그렇게 빛의 속도로 한 시간의 수업을 마치며 나는 아들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일이삼사를 반복해서, 친절하게, 웃으며 알려주시는 선생님 앞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아들 앞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호랑이다를 왜 몰라? 열 번은 했을 거다!"
호랑이를 알려주다가 호랑이 얼굴이 되어 닦달했을 때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을까. 내가 왕초보가 되어 일본어를 배워보니 아들의 심정이 절절히 이해되었다. 역시 언어는 반복이 중요하다. 열 번이 무언가. 백번은 해야 익숙해지고 눈에 들어오고 귀에 박히는 거다. 당해봐야 깨달았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면 다행이다. 그리고 연이어 생긴 합리적인 의심 하나.
'그래서 딸아이가 우리에게 기를 쓰며 일본어를 가르치는 건가? 엄마도 좀 당해보라고....?'
그렇게 여러 가지 교훈과 반성을 남긴 채 첫 일본어 수업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