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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허함을 채우려면, 영화 아트 오브 게팅 바이

의미 부여의 기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다

by 채수빈

영화 <아트 오브 게팅 바이>는 얼핏 보면 크게 줄거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원제는 ‘Homework’로, 주인공 조지가 학교에서 빈둥거리다가 졸업 직전에 1년치 폭풍과제를 하게 되는, 굉장히 사소해보이는 사건을 다룬다. 밀린 숙제하기, 그야말로 찐 하이틴 영화다.


그렇지만 이 사소해보이는 사건 속에는 어른들도 종종 빠져 허우적대는 ‘실존주의의 블랙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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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지는 운명론자다. “인간은 누구나 쓸쓸히 혼자 죽는다, 어차피 사라질텐데 왜 사서 고생인가, 노력한들 뭐가 달라지나”가 조지의 주장이다. 홀든 콜필드가 연상되는 조지는 아마 우리나라 학생이었다면 ‘중2병’ 좀 고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테다. 그는 매일 학교를 땡땡이치며 그림공책에 낙서인지, 작품인지 모를 것들을 끄적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렇지만 중2병은 중2한테만 오지 않는다. 살면서 잊을만하면 실존주의적 블랙홀이 한 번씩 덮쳐오곤 한다.


‘나는 왜 살지?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질문을 던진 다음 밀려오는 '현타'는 한 번 의식하는 순간 쉬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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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술에 재능이 있는 조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선생님들은 조지와 한 번씩 상담을 하며 최선을 다해 그를 지도한다. (정말 좋은 선생님들이다.) 그리고 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공부와 과제를 통한 성장.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우리의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이라구."


아마 영화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리라. <더 아트 오브 게팅 바이>는 직역하자면, ‘시간을 보내는 기술’ 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태어나서 꼭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럴 필요 없지만, 우리가 굳이굳이 의미를 부여한 것 뿐이다. 이 '아무것도 해야 할 필요 없음', 이 잉여로움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백지를 채워나갈 기술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 기술은 어떤 면으로는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어떤 면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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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기술은 학교를 다니고, 과제를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 등 일련의 ‘사회적인 행동들’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영화 초반, 우습게 생각하는 일들이다. 너무나 '뻔해서' 이런 단계를 밟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뻔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실존주의적 위기(existential crisis)에 빠진 조지를 보고 있으면 겉으로는 모든 것에 의미를 상실한 상태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도달한 부작용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존주의적 위기는 사실 자의식이 역기능적으로 작용한, '자의식 과잉' 상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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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하루하루 멍때리며 살아가다 똑같이 땡땡이를 치고 있던 여학생 샐리를 만나게 되고, 첫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던 조지는 마치 사진기로 초점을 맞추듯, 이 사람만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한다. 초점이 맞춰지자, '뻔함'이 뻔하지 않게 된다. 무엇을 그릴지 알게 된다.


선생님들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받아들인 조지는 밀렸던 숙제를 하게 되고 마지막 졸업 작품을 그린다. 막연했던 백지에 사랑하는 샐리의 얼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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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개인적인 기술이다. 사랑하는 것.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조지는 자연스럽게 샐리를 사랑하게 되며 웃음을 찾고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진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고 보편적인 기술을 익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 부여의 기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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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조지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온다. 실존주의가 무서운 건 나를 나에 갇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걸지도 모른다. 나에게 갇히지 않기 위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다. 그저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할 뿐. 막막하다면, 일단 오늘의 숙제를 하고, 오늘 만난 사람을 사랑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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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Therapy

마음이 공허할 때는 내가 아닌 타인에 온전히 집중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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