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돌에 관하여]
올해는 부크크에서 내돈내산으로 책 한 권 만들어보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단 한 권이라도 출판할 수 있다니 마음이 가벼운 걸. 딱 한 권 만들어서 나만 소장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날 생각했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쓴 책 한 권 선물해 주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설명도 귀찮아하면서 누굴 만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호호. 하여간에, 옛날부터 한 권 써보고 싶었기는 했으니까 올해 상반기 목표로 삼았다. 후진했다가 또 전진하면 되니까 조금씩 해 보자.
내 일대기를 적으려면 우선 12년간의 일본 생활은 다른 한 권으로 빼야 할 것 같고, (08년 리먼 쇼크 때 건너가서, 20년 코로나 걸려서 귀국한 외국인 노동자의 대서사시) 아니 뭐 벌써 2탄 생각하고 있는 거야? 김칫국 마시기는 나의 주특기. 하여간에, 그럼 뭐부터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했다. 도서관 독립출판 코너에 있는 책들 보니까 그냥 쓴 책들 많더구먼. 어렵게 생각하니 손가락이 더 안 움직인다. 나도 막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적어봐야지.
내가 언제부터 왜 책을 좋아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집은 아빠가 독서가였다. 책장에 책이 빼곡하게 있었던 기억. 그리고, 나랑 오빠 읽으라고, 어렸을 때 웅진에서 나왔던 누런색 전래동화 전집. 아니 지금 누런색이 표준어가 맞나 해서 네이버 찾아봤는데 영어로는 누런색이 straw color 지푸라기 색깔이라고 나오네. 누런색은 노란색도 아니고 황토색도 아니고 누리끼리하니까 지푸라기 색 맞는 것 같다. 재밌네. 삼천포로 자주 빠지는 것도 나의 주특기 2.
하여간에, 전래동화 전집이랑, 컬러풀한 디즈니 동화전집이 같이 꽂혀있었다. 심심하면, 전래동화책 펼쳐서 보다가, 디즈니 책 펼쳐서 보고. 남매가 해님 달님이 되는 전래동화 읽다가, 예민보스 공주가 이불 맨 아래 완두콩 때문에 배겨서 잠을 못 잤다는 디즈니 동화 읽고. 그렇게 놀았다. 웅진 전래동화는 카세트테이프도 있어서 뒹굴거리면서 들었지. 지금도 집에 있으면 팟캐스트나 유튜브 꼭 틀어놓는데 어렸을 때부터 뭔가 듣는 것을 좋아했구나.
이렇게 상반된 컬러의 동화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지, 국민학교 1학년때 미술시간에 장래희망을 그리랬는데, 동화작가라고 쓰고,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렸었다. 국민학교 입학 기념으로 선물 받은 호돌이 크레파스 세트로 그렸지. 금색 호돌이 메달 모양 크레파스가 들어가 있었는데 말이죠. 왜 기억나냐면, 내가 그걸 떨어트려서 교실 바닥에 메달이 데굴데굴 굴러갔었거든요.
국딩이 장래희망에 동화작가를 쓰다니. 어려서부터 인세 받는 삶을 동경했던 것인가. 인세 받으면서 놀고먹는 게 나의 오래된 꿈인데, 죽기 전에는 이룰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하여간에, 책에 관해서 제일 먼저 기억나는 건, 전래 동화와 디즈니 동화를 실시간으로 번갈아가며 읽었던 일이다. 그 뒤로는, 오빠가 둔촌 1동 마을문고 가서 빌려온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집을 읽고,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는 책 빌릴 때 도서카드에 다 수기로 적어줬었는데. 크으 추억 돋네. 마을문고서 책 빌리고, 종합상가 지하에 떡볶이랑 야끼만두 사서 집에 오면 세상 행복했는데요.
중학교 때는 땐녀랑 로맨스 소설에 빠져서 다락방의 꽃들부터 시작해서 매우 다양한 로맨스 소설을 독파. 둘이서 영어 회화를 다녔었는데 내가 영어 이름을 heaven (소설 주인공 이름)이라고 해서 원어민 선생님이 눈이 튀어나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닥종이 인형처럼 생긴 학생이 오더니, 자기 이름이 헤븐이래. 오 마이갓. 나의 뜬구름 잡는 이성관이 로맨스 소설 읽으면서 고착화된 듯. 그 시간에 토지나 읽을 것이지 이것아.
고등학교 때는 패션지를 한 달에 5-6권씩 빌려서 읽었는데, 보그, 엘르, 하퍼스바자 등의 하이패션에서 에꼴, 쎄씨 이런 틴에이저 잡지까지 섭렵했다. 그러면서, 패션지 기자가 되기를 꿈꾸고, 의상학과를 가고, 잡지사 들어갔다가 그만두고. 뭐 그랬다는 말씀. 매달 잡지 앞쪽에 독자의 소리 코너에 내가 쓴 후기가 실렸는지 찾는 게 꿀잼이었는데. 후기가 실리면 향수나 화장품을 선물로 줬는데 경품을 받으러 잡지사에 직접 가야 했다. 디올 쟈도르 향수받아서 케이스에서 꺼내자마자 뚜껑이 쏙 빠져서 병째로 박살 났던 기억부터, 선물 받으러 가곤 했던 코즈모폴리턴 사무실에 어시스턴트로 출근했던 첫날의 설렘 등등. 보그는 사무실로 가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줘서 나중에는 보그에 후기를 많이 썼었다. 희희.
대학교 때도 항상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백팩에 한 권씩 넣고 다니면서 읽었다.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가 아니고 맞고요. 책 읽으면서 학생식당서 김밥 먹고, 샌드위치 먹고, 아니 뭐 먹은 얘기만 쓰고 있냐 책 얘기 하라니까. 도서관이 다행히 생활과학관 근처에 있어서 책 빌리기는 수월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인데, 나는 활자중독이라 책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싫어했다. 심심하단 말이야. 궁금한 게 많아서 삼천포에도 잘 빠지고, 김칫국도 잘 마시고, 심심한 것을 싫어해서 부산스럽게 군다는 나의 세 가지 특징을 이 글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예? 안물안궁이라고요? 아. 예..
일본에 가서는 한국책을 마음껏 읽을 수 없어서, 항상 갈증이 있었다. 이북은 나중에나 나왔단말이지. 일본 책은 마스다 미리 에세이 같은 건 술술 읽히는데, 추리 소설은 용어들이 어려워서 원서로 읽으면 헛갈렸다. 대학생 때까지는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에는 거의 안 읽는다. 추리소설은 읽어도, 일본 특유의 감성 돋는 소설은 현실의 삶과 괴리가 커서 그런가 소꿉장난 같아가지고. 막.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이러면서 읽는 비뚤어진 중년의 마음.
지금 사는 집은 새로 지은 도서관이 도보 5분 거리에 있어서 애용하고 있다. 나는 도서관이랑 공원만 가까워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살 것 같다. 오늘도 상호대차 신청한 책 들어왔다고 카톡 왔는데 퇴근길에 가서 대여해 와야지. 참고로, 오늘 빌려 올 책은 [큇: 자주 그만두는 사람들은 어떻게 성공하는가]이다. 나를 위한 책 아니냐. 희희.
요즘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나, 영미권 형사물 시리즈, 뇌과학이나 심리학 책 대여해서 읽는 듯하다. 양자역학 책은 빌렸다가, 두 페이지 읽고 바로 반납했다. 이해가 안 갑니다. 안 갑니다요. 추리소설은 일본 책이 재밌긴 재밌지. 그래도, 애거서 크리스티랑 셜록 홈스만큼 재밌는 것은 또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추천드려요.
다행히, 나는 책을 좋아해서, 할머니가 되어도 취미생활을 공짜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기쁘다. 시력만 짱짱하면 되겠다 이 말씀. 아니면 뭐 오디오북 들으면 되지. 내 나이 여든에는 옆구리에 냐옹이 끼고, 커피 마시면서, 책 읽고 있는 귀여운 할머니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