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숙제
나이를 얘기해주기 싫은 나이가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이 질문을 받고 싶지 않은 나이로 정정해야겠다. ‘언제부터인 거지. 피하고 싶어 진 것이…….’알고 싶어 졌다.
이깟 나이가 뭐라고 만 나이까지 운운하며 옹졸한 위안을 받고 싶어 하게 된 거냐고. 초등학교 때 나는 여느 학생들처럼 일주일 전 방학숙제 몰아치기 권법을 구사하곤 했었는데 그중에는 일기도 있었다.
그땐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했었지만 선생님은 아마 알고 계셨겠지. 방학 동안 일기를 빠지지 않고 써 온 학생에게는 학교장 상을 주실 거라고 하시며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지만 나는 손을 차마 들 수가 없었어.
"너 써왔네. 왜 안 들어?" 짝꿍의 말에도 못 들은 척 외면. 선생님을 속일 수는 있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었던 그 날의 수치스러운 기억-
방학은 너무나 짧았고 숙제 검사의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나는 당황했고 거짓일기는 마음에 짐이었다. 진짜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때 그 방학숙제처럼 20대는 너무나 짧았고 숙제 검사의 시기는 어김없이 돌아왔고 이제는 선생님 대신 부모님이 친구가 사회가 동료가 친척이 아니 실은 내가……. 숙제 검사를 하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30대 어리다는 면죄부는 하나 둘 사라지고 나잇값을 본격적으로 매기기 시작하는 때. 아직 젊지만 마냥 어리지는 않은 나이.
무서운 얼굴로 주판알을 튕기며 숫자 계산기를 두드리며 얼마나 해놓았지라는 엄포와 추궁 앞에 작아지고 조바심이 든다.
그 조급함 속에서 거짓일기가 쓰고 싶어 지는 날이면 나는 가끔 그때 그 방학숙제를 떠올리곤 한다. 흐릿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주인 없는 일기와 선명한 부끄러움.
하지만 더 이상 거짓 일기장은 쓰고 싶지 않다. 그건 가짜였고 안 쓴 것만 못한 일기였으니까. 이젠 남들이 보기에 멋지지 않아도 조금 병신 같아도 가짜 말고 진짜 내 일기를 쓸 거다.
그럼 숙제는 하나도 안 하고 지금까지 놀았냐고요? “아니요 죄송한데요~ 제 숙제는 분명 가지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럼 없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제 내 숙제는 내가 정해요.”
그리고 숙제 검사하러 좀 오지 마, 더 이상 나는 어린이날 선물 받는 어린이가 아니니까-
덧붙이는 글 : 나이는 절대적인 나이, 생물학적인 노화에 따른 신체나이, 정서적인 나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나이(동안, 노안), 경험에 양에 따른 나이 등등 나이의 정의는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절대적인 나이가 삶의 스펙트럼을 대변하지 못하는 이유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