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과 수치심에 관하여
강화길 작가님의 단편소설 모음집 <화이트호스>를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며 그를 둘러싼 사건과 공기를 글로 표현하는데 와... 정말 감탄했다. 읽어본 적 없는 한국소설이구나! 했다. 이후 장편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었는데 재미있긴 했으나 작가님의 단편소설들만큼 강렬하게 남진 않았다. 그리고 2025년 10월, 내가 읽은 세 번째 작가님의 소설은 <치유의 빛>이다.
소설에는 깡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토를 반복하는 30대 지수의 현재 삶과 과거의 뚱뚱했던 시절 지수의 모습이 교차해 등장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키는 게 두려워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던 지수는 어느 날부터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게 되고 그 와중에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까지 갑자기 돌아가신다. 고통 속에서 지수는 자신의 특별한 친구 해리아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소설 자체는 술술 읽히고 채수회관에 담긴 비밀이 뭔지, 과연 지수가 해리아를 만나게 되는 건지가 궁금해 몰입이 잘 되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크게 남은 건 없다. 아... 이렇게 끝나나? 정도. 다만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조지오웰이 통증 속에서도 글을 썼다는 문장을 인용해 놓은 것을 보고 작가님이 왜 이 소설을 썼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여성의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한 통증이라면 출산일 텐데 그 출산도 사실 다른 산모들에 비해 난 덜 어렵게 해냈다.(무통주사 안 맞음)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엄청 아프긴 했는데 다 해내고 나서의 카타르시스가 통증을 잊게 해 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통증만큼이나 이 소설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수치심이다. 지수가 거대한 몸을 가졌던 어린 시절에 느껴야 했던 그 수치심. “돼지년”이라는 그 날카롭고 모욕적인 말. 말보다 어쩌면 더 잔인했던 눈빛들. 여성들 대다수가 평생토록 이상적인 몸을 가지지 못해 느껴야 하는 그 수치심이 어떤 것인지 지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뭔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종종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들이 사실은 뭔가로부터 간절히 도망치고 싶어서 그렇게 애쓰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지수가 깡마른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과거의 그 강렬한 수치심인 것처럼.
소설이 내게 크게 와닿지 않은 이유는 ‘지수’라는 인물에게 내가 깊이 공감하지 못해서인 것 같다. 마른 몸을 향한 욕망이야 한국여성으로서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지만 나는 지수만큼 깊은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3년 전 난소 혹 제거와 자궁내막증 수술 이후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이전보다 살이 더 잘 찌는 몸이 된 나는 다이어트를 반복하다 요즘은 좀 체념하고 있는 상태다. 이상적인 몸까진 바라지 않고 그저 ‘적당한’ 보통의 몸을 원하는데도 이렇게 힘들어야 한다면... 그 ‘적당한’ 몸을 욕망하는 내 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힘들어하며 그런 몸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이 욕망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그 적당함의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지도 함께 고민하며 말이다.
지수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겪어야 하는 것도 어쩌면 수치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먹토를 반복하며 자기 몸을 학대하듯 살아온 결과일 수도 있고. 정확한 원인은 의사도 밝히지 못했으니 누구도 알 수 없겠지. 다만 타인의 시선으로 자꾸 자기를 판단하고 조각하기 시작하면 몸은 아프지 않을 수 없고 몸과 연결된 마음도 반드시 함께 고통받게 된다는 것. 소설을 읽으며 깨달은 것이다.
지수를 비롯해 채수회관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채수회관을 만든 해리아와 신아 모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러운지를 알고 싶어 한다. 세상과 깊이 연결된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벽 앞에서 무너지거나 그걸 뛰어넘어 도약하기 마련인데 몸 앞에서 우린 어쩌면 더 쉽게 무너지는 것 같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강하게 확신할수록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니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누군가는 기도했던데 환경 못지않게 몸 앞에서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내 것이지만 내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는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임을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지금 내가 내 몸에 대해 하고 있는 체념도 건강한 것이라곤 할 수 없다. 난 오히려 지수 같은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의 유형에 속하겠지. 너무 나를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 온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수와 다른 사람이지만 나의 수치심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더욱 곰곰이 들여다봐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