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내 안의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내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소리가 내 심장을 먼저 울렸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건지, 어디가 불편한 건지, 아니면 기저귀가 젖어서 기분이 나쁜 건지. 말은 못 해도, 그 울음 속에 실린 감정과 필요를 나름대로 구분해냈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아이의 기분을 살피고,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아기와의 언어'를 배웠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오갔다. 마음을 읽고, 마음으로 응답하는 이것이 진정한 돌봄의 정수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중년에 접어들었을 즈음, 내게 또 다른 돌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부모님을 향한 돌봄이었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진 어머니,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아버지. 갑자기 그분들이 '나의 손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움과 혼란 속에 빠졌다. 내게는 이미 익숙한 돌봄의 기억이 있었음에도, 부모를 돌보는 일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부모를 돌보며, 그분들의 마음을 읽고 있는가? 그저 ‘해줘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기의 울음소리에 그렇게 민감했던 내가, 왜 부모님의 말에는 무심해질까? 아이 돌봄과 부모 돌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이를 돌볼 때는 사랑과 본능이 앞섰지만, 부모를 돌볼 때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앞서고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70대 초에 치매가 왔다. 이미 그 전에 아버지가 자신이 치매 같다고 말했지만 자식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치매 환자가 많지도 않았고 치매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많이 부족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내 아버지가 치매일 리가 없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드린 말씀이, 젊은 우리도 깜빡깜빡한다고 별거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어렸고 회사 다니랴 아이들 키우랴 정신도 없었고, 부모님을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치매 증세가 심해진 후에야 자식들이 모두 모여 비상회의를 열었다. 치매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찾기 힘들었고, 엄마 혼자서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요양병원이라는 이름의 병원은 없었지만 그런 형태를 띤 병원은 드물게 있었다. 그 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켰지만 아버지의 증세는 더 악화되었다. 아버지는 5년간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병세가 중증으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책 때문에 괴로웠다. 제 자식의 변화는 작은 거라도 민감하게 알아채면서 아버지는 직접 호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왜 그분들이 말할 때,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읽지 못했을까. 나는 부모님의 돌봄을 관계로 여기지 않고, 책임으로만 여겼다는 인식이 나를 아프게 했다.
책임으로서의 돌봄은 체크리스트와 같다. 병원 모시고 가기, 약 챙겨드리기, 안전하게 모시기. 하지만 관계로서의 돌봄은 다르다. 마음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아이를 돌볼 때 나는 관계적 돌봄을 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쓰고, 아이와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업무적 돌봄을 했다. 해야 할 일을 하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그 뒤 나에게는 초기에 병을 잡아야 한다는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그 덕분에 엄마에게 건강상 문제가 생기면 나는 온갖 정보를 뒤지며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그 덕에 엄마는 장수하고 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의학적 돌봄은 완벽했지만, 정서적 돌봄은 여전히 부족했다.
“죽으려고 하면 병원 데리고 가서 살려놓고, 또 죽으려고 하면 병원 데리고 가서 살려놓는다”고 엄마가 직접 말했다. “90이 넘었고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으니 이젠 가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안 죽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정성껏 엄마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나는 엄마의 몸만 돌보고 있었지, 엄마의 마음은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의 몸은 점점 약해졌고, 어떤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가 어려웠다. 병원에 모시고 갈지, 요양보호사를 둘지, 어떤 음식을 드릴지, 이런 사소한 일조차 이제는 ‘자식들 회의’를 통해 정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형편과 여건을 고려해야 하고, 누가 더 자주 들를 수 있는지, 누가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도 따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결정 속에서 정작 중요한 질문이 늘 빠진다.
“지금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지금 엄마가 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우리는 엄마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엄마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엄마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만 집중했다. 이것이 바로 돌봄의 주체성 상실이었다. 돌봄받는 사람이 객체가 되고, 돌봄 제공자들만 주체가 되는 상황이다. 돌봄의 언어는 사실 그들의 마음을 묻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님의 의견은 생략된다. 갑자기 병이 깊어진 부모님께 자식들은 명령조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왜 또 넘어지셨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이거 드시라니까요.”
“그러다 큰일 나요.”
이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부모를 위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자식들의 감정과 피로, 불안이 담긴 말이다. 그런 말이 쌓일수록 부모님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목소리는 작아진다. “내가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 그 말들은 결국 마음을 닫게 만든다. 이런 언어는 돌봄이 아니다. 그것은 통제이고 지시다. 돌봄받는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언어다.
부모님의 마음은 말이 아닌 태도에 더 많이 담겨 있다. 침묵, 고개 돌림, 한숨, 눈치, 또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읽으려면, 다시 '마음을 듣는 귀'를 열어야 한다. 아이를 볼 때처럼, 애정과 집중이 필요하다. ‘무엇을 원하는지’보다는 ‘어떤 마음인지’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돌봄의 언어다.
진정한 돌봄의 언어는 이런 것들이다:
"엄마,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무엇이 제일 힘드세요?"
"어떻게 해드리면 좋을까요?"
"엄마가 원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돌봄받는 사람이 여전히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언어다. 그들의 의견과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다.
아기를 돌볼 때처럼, 부모님을 돌볼 때도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한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돌봄받는 사람의 마음을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무엇이 힘든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답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진짜 마음이라면 들어야 한다.
마음을 묻는 돌봄. 이것이 내가 아버지를 통해 배운, 그리고 엄마를 통해 계속 배워가고 있는 돌봄의 진짜 의미다. 돌봄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언어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마음을 묻고 마음으로 응답하는 언어여야 한다. 그래야만 돌봄이 진정한 관계가 되고, 서로의 존엄이 지켜지는 아름다운 만남이 될 수 있다.